고산 유고

 

 

 

                                              
   고산유고(孤山遺稿)는 고산선생의 작품집으로, 유고(遺稿) 6권과 부록(附錄)인 연보(年譜) 및 유사(遺事) 3권 등 모두 9권으로 편간(編刊)된 것이다. 고산유고(孤山遺稿)는 정조(正祖)의 명에 의하여 1791년(정조 15)에 전라감사 서유린(徐有隣)이 간행한 것을 다시 1796년(정조 20)에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가 고산선생의 본가(本家)에 소장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와탈(訛脫)된 것을 첨삭하여 고산집(孤山集) 15부를 재차 간행한 것이며, 그 뒤에 고종35년 고산선생의 10세손인 윤관하(尹觀夏)에 의하여 년보(年譜)와 고산유사(孤山遺事)의 증보판(贈補板)이 부록(附錄)으로 보첨(補添)되어 간행(刊行) 되었다.
   
  

 

 

고산유고(孤山遺稿)의 구성

   목판본. 6권 6책.

   권1          ·오언고시(五言古詩) ·칠언고시(七言古詩) 및 율시(律詩) ·절구(絶句) ·집고(集古) ·회문(回文)
                   등 250편
   권2          ·소(疏) 16편<병진소(丙辰疏), 논원두표서(論元斗杓 疏) 등>
   권3
        상(上) ·소(疏) 13편<걸해소(乞骸疏), 국시소(國是疏) 등>
                  ·예설(禮說) 2편
        하(下) ·서(書) 17편<상친정서(上親庭書), 답인서(答人書), 상금계군서(上錦溪君書) 등>
   권4          ·서단(書單) 100편<답이현풍서(答李玄風書), 객목(客目) 등>
   권5
        상(上) ·서(書) 21편 <여갑산백서(與甲山伯書), 별지(別紙) 등>
        하(下) ·제문(祭文) ·회문(回文) ·축문 13편<산신축문(山神祝文), 부용동토신제축문(芙蓉洞土神祭祝
                   文) 등>
                  ·조약(條約) 1편<향사당조약(鄕社堂條約)>
                  ·서(序) 4편<삼수군선생안서(三水郡先生案書) 등>
                  ·기(記) 2편 <금쇄동기>
                  ·설(說) 2편<마천견 설(馬踐犬 說) 등>
                  ·비명(碑銘) 5편
                  ·잡저(雜著) 5편<신해원일기회(辛亥元日記懷), 견동고율곡(見東皐栗谷) 등>
                  ·산릉의(山陵議) 11편<벌아치산(伐兒峙山) 등>
                  ·잡록(雜錄) 3편<성산적래후추고함답(星山適來後推考緘答), 공사(供辭) 등>,
   권6
        상별집(上別集)
                  ·시(詩) 8편<인간독사객군신(人間讀史各 君臣), 청풍명월불용일전매(淸風明月不用一錢買),
                                  모설방고산(冒雪訪孤山) 등>
                  ·부(賦) 4편<취선루부(醉仙樓賦), 상우부(尙友賦) 등>
                  ·논(論) 3편<잠 화일기론(簪 花一枝論) 등>
                  ·책(策) 6편<대춘책(對春策), 대경전종지책(對經傳宗旨策) 등>
                  ·표전(表箋) 4편<의고려곽(擬高麗郭) 등>,
        하별집(下別集)
                  ·가사(歌辭) 17장 75수,
                  ·부록에 시장(諡狀)<홍우원(洪宇遠) 시장(諡狀) 23장>

  부록(附錄)
        권1 년보(年譜)
        권2 년보(年譜),
        권3 고산유사(孤山遺事)


  본집은 原集 6권, 附錄 합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序文은 없다. 맨 앞에 卷目이 있고, 卷別 目錄이 각기 따로 실려 있다.
  권1은 詩 250여 題이다.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五言의 古詩, 律詩, 絶句, 集古와 七言의 古詩, 律詩, 絶句, 回文, 集古의 시들이 섞여 있다. 시의 제목 아래, 또는 본문 중에 小字로 註가 달려 있는데 編者註와 自註가 구별되어 자세히 붙어 있다. 14세에 安邊 任所에 따라가 있을 때 지은 〈自國島廻舟〉를 시작으로, 1616년 慶源 유배, 1618년 機張 移配, 1623년 석방, 1633년 과거 급제 및 關西 京試官 차임, 1637년 甫吉島 芙蓉洞 卜居, 1638년 盈德 유배, 이듬해 석방, 海南 水晶洞과 聞簫洞, 金鎖洞, 甫吉島 芙蓉洞 卜居, 1660년 三水 유배, 1665년 光陽 移配, 1667년 석방 등의 시기에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주로 伴琴 權海, 樂忘 金時讓, 季夏 李海昌, 任叔英, 子羽 鄭振溟 등과 수창한 시가 많으며 集古體의 시도 종종 눈에 뛴다. 맨 끝에 연대를 알 수 없는 〈記諱日詩〉가 있는데, 親家와 外家 조상의 忌日을 엮은 시이다.
  권2와 권3上은 疏(25)로,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1616년에 進士로서 李爾瞻, 朴承宗 등의 주벌을 청한 〈丙辰疏〉, 1635년에 星山 縣監으로서 量田의 문제점을 논한 〈乙亥疏〉, 1644년에 議藥의 召命을 받고 사양하면서 올린 〈甲申疏〉, 1649년에 새로 즉위한 孝宗에게 進言한 〈己丑疏〉, 효종 3년(1652)의 사직소들과 削黜의 계기가 된 〈論元斗杓疏〉, 1658년 鄭介淸을 변호하고 그의 문집 간행을 청한 〈國是疏〉, 1660년 慈懿大妃 服制의 三年說을 주장한 〈論禮疏〉와 〈禮說〉 2편 등이 실려 있다. 특히 〈國是疏〉에는 鄭介淸의 〈東漢節義晉宋淸談說〉과 이에 대한 저자의 序文, 己丑獄事 때의 鄭介淸의 供辭가 부기되어 있다.
  권3下~권5上은 書(107)와 單子(1)이다.
1616년 〈丙辰疏〉를 올리기 전 부친에게 여쭌 〈上親庭書〉를 시작으로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사돈 鄭世規와의 안부 편지, 海南에 있을 때 全羅 監司 趙啓遠에게 보낸 規戒의 편지, 鄭維岳의 「大學」問目 등에 대한 답서, 孝宗 승하 후 看山의 명을 받고 摠護使 沈之源에게 올린 편지, 三水 유배 시절 趙絅에게 보낸 편지 등이 실려 있다. 특히 摠護使에게 올린 편지는 후일 正祖가 중히 여긴 글이 되었다. 單子 1편이 편지와 함께 실려 있는데, 1648년에 海南 城主 李遇臣에게 門中의 문제로 올린 것이다. 맨 끝에 편차 후 추가로 얻은 편지 두 편을 실어 놓았다.
  권5下는 祭文, 回文, 祝文, 條約 합 13편과 序(4), 記(1), 說(2), 碑銘(5), 雜著(5), 議(1), 雜錄(3)이다. 條約은 正風俗, 勵廉恥 등 6개 항목을 정하여 鄕所에 보낸 글이다. 記는 1640년 海南에 있으면서 지은 〈金鎖洞記〉이다. 碑銘은 鄭雷卿, 錦山君 李誠胤 등의 것이고, 雜著로는 服制 문제로 三水 유배 때 지은 〈敍懷〉 등이 있다. 議는 孝宗의 승하로 명을 받아 看山하고 나서 올린 〈山陵議〉이다. 水原의 金英烈 墓山, 尹磻 墓山 등과 아울러 西人들이 주장한 健元陵 左岡 등을 논하여 水原으로 정하기를 청한 글이다. 이 역시 正祖에게 중시된 글이다. 雜錄에는 1635년과 1659년의 推考 緘答과 1638년의 供辭가 실렸다.
  권6은 別集으로, 上은 詩, 賦, 論, 策, 表箋이고, 下는 歌辭이다.
詩는 〈人間讀史各君臣〉 등 長篇만 8수 실려 있으며, 賦, 論, 策, 表箋에는 節製, 科製, 陞補試, 鄕試, 別試, 殿試 등에 지은 17편을 모아 놓았다. 歌辭는 본집의 주요 부분으로, 연대순 편차이다. 1642년 盈德 유배 후 海南 金鎖洞에서 지낼 때 지은 〈山中新曲〉, 1645년에 역시 金鎖洞에서 지은 〈山中續新曲〉과 〈古琴詠〉, 1651년 甫吉島 芙蓉洞에서 지은 〈漁父四時詞〉, 1652년 孤山에 있을 때 지은 〈夢天謠〉 등이 있고, 맨 뒤에 1618년 慶源 유배 때 지은 〈遣懷謠〉와 〈雨後謠〉가 붙어 있다. 각 歌辭에 저자의 識가 함께 실려 이해를 돕고 있다.
  附錄은 1677년경 洪宇遠이 지은 諡狀이다.



   목판의 전체크기는 대략 가로 49㎝이며, 변란은 사주가 쌍변으로 되어 있으며, 반곽의 크기는 가로 16㎝, 세로 21.5㎝이다. 반면은 10행으로 되어 있고, 한행에 21자씩 배치되어 있다. 왼편의 1행에 '고산유고'라는 권두서명이, 가운데의 판심부에는 상어미 위쪽의 '孤山遺稿'라는 판심서명이 보이고 있다. 어미의 안쪽으로 권수 및 장수가 표시되어 있으며, 하엄 아래로 편명이 판각되어 있어 매우 특이한 모습이다


고산년보(孤山年譜)

   연보(年譜)는 고산선생의 아들인 윤직미(尹直美)가 편한 것과 고산선생의 외손인 약봉 심상서(藥峯 沈尙書)가 기록해 놓은 것을 책번보략(책繁補略)해서 상 하 2권으로 엮고 또 허미수찬(許眉수撰)의 신도비명(神道碑名)과 아울러 효종(孝宗)이 잠저시(潛邸時)에 내린 어찰(御札)과 열성조(列聖朝)의 포찬(褒讚)의 말과 공의 유사 10여조(遺事 十餘條)를 비롯하여 고산선생에게 준 다른 이의 시 몇편을 모아 한 권을 이루어 이를 녹우당(錄雨堂)에서 11세손 윤관하가 활자본(活字本)으로 인행(印行)하였다. 이 뒤의 임신년(1932 A.D)에 이르러 미천원(眉泉院) 강당(講堂)에서 사론(士論)을 준발(峻發)하고 종족(宗族)이 순모협동(詢謨協同)하여 솔선의 정성을 보여 년보신간(年譜新刊)을 계획하였다. 계유(1933 A.D)년 겨울 13세손 윤정현이 간역(刊役)을 착수하여 월명년(越明年)인 을해(1935 A.D)년 봄에 목판본으로 각인(刻印)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다.

고산유사(孤山遺事)

   - 허미수찬(許眉수撰)의 신도비명(神道碑名)
   - 효종(孝宗)이 잠저시(潛邸時)에 내린 어찰(御札)
   - 열성조(列聖朝)의 포찬(褒讚)의 말
   - 고산선생의 유사 10여조(遺事 十餘條)
   - 고산선생에게 준 다른 이의 시 몇편 등

고산유고 및 년보의 간행경위(刊行經緯)

   정조(正祖) 4년(1780) 경자춘(庚子春)에 고산집(孤山集)을 <인입(印入)>케 한 것은 고산집에 실려있는 효종 10년(1659 A.D)의 「기해헌의(己亥獻議):산릉의(山陵議)」를 보고자 함이었다. 이 때에 정조는 영릉을 수원으로 천원할 뜻이 섰으나 잠잠히 10년을 지내다가 옮기기로 결단을 내린 것은 정조 13년(1789 A.D) 기유에 올린 박명원의 소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영릉을 화산으로 천원(遷園)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효종(孝宗)의 산릉(山陵)을 수원(水原)으로 정하자고 주장하였던 윤고산의 「기해헌의(己亥獻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조는 천원(遷園)에 앞서 1789년에 正字로 있던 6대손 윤규범(尹奎範)에게 명하여 「산릉의(山陵議)」외에도 고거(考據)할 만한 문헌을 본가(本家)에서 찾아보도록 명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천원한 뒤에도 고산의 「산릉의(山陵議)」가 매우 상세함을 칭양(稱揚)하며, 천원한 것으로 자위(自慰)함을 일렀다. 그리고 그의 감여학(堪輿學)에 대한 신안(神眼)을 칭양하여 이 사실을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등재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정조 20년(1796 A.D) 병진 3월에 다시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에게 명하여 종래의 간본에서 잘못되고 빠져 버린 것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신간육책(新刊六冊)을 간행하고, 15부를 인진(印進)케 하였다. 그것을 내각(內閣)에 수장(收藏)하고 본손가(本孫家)에는 첫째권 머리에 「내사(內賜)」본임을 어필(御筆)로 친제(親題)하여 내렸다.  

  저자의 시문은 아들 윤직미(尹直美), 손자 윤이후(尹爾厚) 등에 의해 정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尹直美는 學官으로서 저자의 年譜 草稿를 만든 바 있으며, 尹爾厚는 1674년에 저자의 庚子年 〈論禮疏〉 및 〈禮說〉을 올렸다가 정원에서 기각당한 바 있고, 홍우원(洪宇遠)에게 諡狀을, 허목(許穆)에게 神道碑銘을 부탁한 사람이다. 또 外孫이자 門人인 심단(沈檀)도 또 다른 年譜 草稿를 만든 바 있어 그도 문집 간행에 간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시문을 수집, 편차하여 6권의 定稿本으로 만들어 목판으로 간행한 뒤 집안에 소장해 두었던 것이다.《초간본》 그 시기는 본집에 序跋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본집에 1677년경 지어진 洪宇遠의 諡狀은 附錄으로 실리고 1680년에 지어진 許穆의 神道碑銘은 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1678년 9월 저자에게 諡號가 내려진 시기를 전후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이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 이후 正祖 때에 이르러 水原으로의 遷都를 도모하면서 일찍이 孝宗의 山陵을 水原으로 정하자고 주장하였던 저자(윤고산)에 대해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장본 「孤山遺稿」(한46-가1152)의 附錄 遺事에 의하면, 1780년 봄에 正祖의 명에 의하여 全羅 監司 서유린(徐有隣)이 「孤山集」을 인쇄하여 10질을 內閣에 들였다. 이때 올린 것이 곧 위의 초간본이었을 것이다. 또 正祖는 1789년에 正字로 있던 6대손 윤규범(尹奎範)에게 명하여 本家의 문헌 가운데 〈山陵議〉 이외에 더 근거할 만한 것을 찾아 올리도록 명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1796년 3월에 이르러 全羅 監司 서정수(徐鼎修)가 역시 正祖의 명으로 「孤山集」15질을 인쇄하여 올렸다. 水原城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어 낙성을 앞둔 이때 正祖는 다시 저자에게 관심을 기울여, 이미 올렸던 「孤山集」을 열람한 뒤 전라 감사 徐鼎修에게 명하여 刊本의 訛缺을 고쳐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徐鼎修가 海南縣으로 사람을 보내어 白蓮洞 尹氏家의 藏板을 海南縣衙로 옮겨와 수십 板을 고쳐 改刻하고 새로 인쇄하여 올렸던 것이다.《보각후쇄본》 초간본이 현전하지 않아 보각된 부분이 어디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1282), 장서각(4-5758),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61-1)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98년에는 10대손 윤관하(尹觀夏)의 주도로 年譜 및 神道碑銘, 遺事, 詩 두세 편이 1권의 附錄으로 만들어져 海南 白蓮洞에서 活字로 인쇄되었다. 이때 年譜는 尹直美가 만든 草稿와 沈檀이 만든 草稿를 참고, 대조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장본(한46-가1152)의 附錄이 그것이다.
  또 1935년에는 12대손 윤정현(尹定鉉)의 주도로 연보가 새로 목판으로 간행되고 문집이 보각되었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에서 나온 「李朝名賢集3」의 「孤山遺稿」가 이 본으로 보인다.
  본서의 저본은 1796년에 보각된 후쇄본으로서, 규장각장본이다.


   산릉의(山陵議)란 고산선생이 현종때 효종의 왕릉을 선정하기 위하여 간산(看山)에 참여하면서 고산선생이 살펴본 왕릉의 자리에 대하여 느낀 바를 자세히 적은 기록이다.

간차(刊次)

 간년(刊年)

 간인자(刊印者)

 체재(體裁)

 비고(備考)

 초간본
 (初刊本)

 ?

 ?

 ?

 초간본(初刊本)
 정조15년 을유 신해설무근

 간본인입
 (刊本印入)

 정조4년 경자 
 (1780)

 서유린(徐有린)

 ?

 명(命)에 의함
 10질인입(10帙印入)

 *

 정조13년 기유 
 (1789)

 박명원(朴明源)이 산릉소(山陵疏)를 올림

 

 

 개간본인진
 (改刊本印進)

 정조20년 병진 
 (1796)

 서정수(徐鼎修)

 6권6책

 명(命)에 의함  
 15질인진(15帙印進)
 정조22년 무오설무근

 연보활인
 (年譜活印)

 고종35년 무술 
 (1898)

 윤관하(跋)
 (尹觀夏)

 3권1책

 고산선생의 10세손

 연보각인
 (年譜刻印)

 을해년(1935)

 윤정현(跋)
 (尹定鉉)

 3권1책

 고산선생의 12세손

참조: 윤고산시연구, 홍재걸,새문사
      : 金炅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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