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綠雨堂)의 유래

고산선생이 인조 6년 봉림과 인평 양대군의 사부를 지낸일이 있었다. 후에 왕위를 이은 효종(봉림)은 지난날 사부였던 고산선생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여 피세생활(避世生活)을 하던 선생을 불러들여 성균관에 재직케 했으나, 시배(時輩)들의 시기(猜忌)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 효종이 "전승지 윤선도는 참혹하게 무함을 받았으니 필시 서울에 있기가 편안치 못하여 도로 내려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같이 낭패스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실로 내가 당초에 역말로 부른 존례의 뜻이 아니다. 본원은 나의 유지를 전하여 그로 하여금 내려가지 말고 진퇴를 종용히 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 게 함이 좋겠다."하였다.

이 때, 효종(1652, 孝宗 3년 4월)이 미안함에 무엇인가 선생에게 보답해주고 싶고, 또, 사부인 고산선생이 멀리 해남에 계시면 왕의 과실을 충고보좌하기 어렵다 하여 가옥 한채를 하사하여 가까이 살도록 했다고 한다.

이 집을 처음에는 화성(수원)에 지어 주었는데, 고산선생이 82세이던 현종 9년(1668년, 무신년)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생활을 청산하면서 그 집의 일부를 뜯어서 해로로 백포를 통하여 해남으로 운반해와 옛모습대로 다시 지었는데, 현 해남 연동에 있는 녹우당의 사랑채가 그것이다.

이 집 당호현판(堂號懸板)에는 그 당시 해남윤씨로써 화성(華城) 주인이 되었다하여 "以海尹華城主"라 적혔는데 지금 그 현판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집의 수원터가 어디인지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 녹우당 현판은 동국진체의 대가인 옥동(玉洞) 이서(李서: 1662~1723)의 글씨로, 이서는 조선 후기 실학 거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형제로 이들과 고산선생의 증손자인 윤두서와의 깊은 교분으로 써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