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고산(孤山) 청소년 백일장 / 대 상
오가희(황산실업고 3년)
2008년 10월 02일 (목) 09:28:33 해남신문 hnews@hnews.co.kr

   
 
 

 오가희 (황산실업고 3년)

 
 
친 구

1990년 11월 29일,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동생과 내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조용한 마을이라 친구도 없이 할머니 댁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유년 시절을 지나와서 그런지 동생과 나는 언니, 동생보단 친구가 더 편했다. 그러면서 언니라 꼬박꼬박 부르던 동생이 어느 샌 가부터 부르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우리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그러나 다 학교 근처나 우리 집과는 반대 방향이여서 나는 동생과 먼 거리를 사이좋게 손을 잡고 집에 걸어오곤 했다.

우리가 늘 사이좋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동년배라 싸움이 유달리 잦아서 집에선 울음소리와 매 맞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빠가 유달리 엄하셔서 싸우다가 아빠가 보시면 큰일이기에 우리는 늘 엄마가 계실 때 싸웠다.

그러면 엄마께선 내게 니가 언닌데 참았어야지, 동생에겐 어디 동생이 언니한테 대든다며 회초리를 들고 우리를 때리셨다. 그럴 때마다 잘못했어요, 반성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라며 엄마께 용서를 빌고 동생과 껴안으며 사과를 했다.

그러나 어릴 땐 돌아서면 잊어버리듯이 동생과 나는 사이좋게 놀다가 치고 박고 싸우기를 반복했다.
6학년 때 학교에서 요리실습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날 만들어 먹었던 음식이 상해서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동생이 병문안을 왔는데 아프지 말라고 장미 꽃 한 송이를 가지고 왔다. 내가 퇴원한 후 동생과는 별탈없이 초등학교 시절을 마쳤다.

남들보다 철이 일찍 들어 중학교 시절엔 싸우지도 않았다. 언니들이 타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어 집안일과 양식장 일을 동생과 내가 도맡게 되었다.
양식장 일도 농사 못지않게 힘들어서 얼굴을 찌푸리며 하는데 동생과 나는 마을에 친구가 없으니까 사이좋게 웃으며 일을 했다.

3학년 때 우리는 반이 갈라지게 되었다. 동생이 1반, 내가 2반이 되었다. 처음 오신 영어 선생님께서 우리 반 출석을 부르실 때 날 보시곤 한참동안 생각을 하셨다. 그 이유를 여쭤보니 1반에 있던 애가 2반에 있다며 뭐라고 하셨다.

그러자 친구들이 얘들은 쌍둥이라며 말을 해줘 그 상황을 넘어갈 수 있었다. 유치원을 다닐 때 졸업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갔는데 찍혀져 있는 사진을 보시고 왜 똑같은 얘가 2번씩이나 찍었다며 사진을 버리셨다. 하필 그게 동생 사진이라 받을 때 없어서 사진을 다시 찍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해드렸는데 너네는 충분히 그럴 거라며 웃으시며 얘기하셨다.

우리는 일찍이 취업을 결정하고 전문계고에 입학을 했다. 3학년이 되어서 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류전형에 합격해 면접을 보러가게 되었다.

처음엔 면접관들도 헷갈려하시더니 나중엔 서류에 찍힌 이름을 보시며 질문을 하셨다. 면접을 본 곳에서 둘 다 붙었으면 좋으련만 쌍둥이란 이유로 떨어졌다. 그 때 나만 붙어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동생은 미안해하지 말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도 너만은 붙어서 정말 다행이라며 축하해줬다.

어느 날 동생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배도 아파하고 발목도 아프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걱정인데 취업과 관련되는 문제라 부모님보다도 내가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항상 당당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놓인다.

집에 걸어갈 때 우리는 자주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하며 걸어간다. 그 얘기에 정신이 팔려 이야기를 끝내보면 어느새 집에 다 와있다.

동생과 나는 19살의 끝자락을 향해 걸어간다. 서로 다른 곳에 취업을 확정해 놓은 지라 집에서나 학교에서처럼 더 이상 다정하게 생활을 할 수 없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 동생과 함께 더 좋은 자매, 더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 사랑한다, 친구이자 동생인 너를…


출처 : 해남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