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의 문학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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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선생의 문학사적 의미

1.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그외 도ㆍ불ㆍ 노장 등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수용하고 있다.
2. 작품을 창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문학관이 확고하게 지니고 있었다.
3. 자연시인이라 할 정도로 자연을 제재로한 작품이 많았고, 자연을 생활화 하였으며, 자연을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방법 또한 다양했다.
4. 표기체계에 있어서 국문이든 한문이든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시상을 전개해 나갔는데, 이런 작품들이 모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수하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5. 한시와 시조의 동질성을 이중적 작업으로 시도하였다.
6. 생생한 생활체험의 문학이었다.

   어떻든 고산선생의 삶은 문학이었고, 선생의 문학은 바로 삶 자체였다. 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면서도 풍부한 상상력과 참신한 이미지를 구사하였으며 진솔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그 바탕이 되는 사상적 측면을 살펴보면

유교사상

해남윤씨가에서 추구하는 소학(小學)의 밑바탕에는 민본위민적 실천사상(民本爲民的 實踐思想)이 짙게 깔려있다. 이러한 민본위민사상(民本爲民思想)은 고산선생이 후손에게 남긴 충헌공 가훈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부분으로 윤효정으로부터 시작된 가학의 전통(三開獄門積善之家)이 고산선생을 거쳐 공재 윤두서에 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산선생은 평소 '소학'을 "사람이 되는 법이 다 여기 있다."하여 학문의 기본서로 삼을 만큼 이를 애독했고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선생의 사상의 근본은 자연 유교정신에 철저했고 특히 유교의 으뜸가는 도덕윤리인 충(忠)과 효(孝)에 귀결되었다. 선생은 큰아들이신 인미(仁美)에게 보낸 가훈(家訓)에서 인생의 덕목(德目)을 벼슬에 두지 않고 수신(修身)과 근행(謹行) 및 적선(積善)에 두고 있고 인자한 행실과 검소절약을 제1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소학정신속에는 실천적인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사상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어 후에 해남윤씨가의 박학다식(博學多識)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뿌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고산선생은 어린 시절 생부모(生父母)를 떠나 양부모(養父母) 밑에서 지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자아가 매우 발달하였다. 이러한 자아의 발달은 정분(情分)보다는 이치(理致)를 중시하는 경향성을 가지게 하였고, 남에게 자신을 굽히지 않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지도록 하였으며, 그만큼 타인에 대한 불신감도 클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고산선생은 인평대군(麟坪大君)과 뒤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벼슬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고산선생과 효종은 상호 복종과 상호 지배의 이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고산선생의 임금에 대한 감정은 복종과 지배가 언제나 상호 관련되어 있는 복합적인 감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고산선생은 자아에 의하여 억제된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음악에 의지하였다.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소용뿐만 아니라 기쁨을 돕는 소용도 있기 때문이었다.

끝으로 고산선생은 외곬으로 발달한 자아가 좌절하게 되었을 때마다 보길도를 찾음으로써 이를 치유할 수 있었다. 보길도는 고산선생에게 어린 시절 잃어버린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영역이었다. 이 보길도에서 고산선생의 자아는 어떠한 좌절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산선생의 삶의 굴절은 이 유학이념의 견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생에게 한때의 영광을 안겨 준 것도 유학이었지만 선생이 지녔던 선비적 기질이나 지사적 내지 우국연민적 생활신조도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생에게는 불행의 인자였다. 만약에 고산선생이 유학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들 18년의 귀양살이는 애당초 없었을 것이다. 당시 풍토 탓이겠지만 고산선생은 이 사상의 포로가 되어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고산과 유학사상과는 애증관계로 치부된다고 하겠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었던 이 이데올로기는 고산 구성인자의 핵이었다. 얼신 이이첨을 통매한 것도, 예소론에서의 치열함도 모두 유학의 중무장 탓이었다. 어찌보면 고산선생이 평생에 당했던 고통의 무게도 이 이념의 적층과정과 비례해 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떻든 고산선생은 유학을 논리화하는 데 지극한 공적을 남긴 주자를 흠모하고, 이를 자기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유학이념 수용을 이렇게 자백한 셈이다.

도교사상

고산문학의 배경사상 일부가 도교사상이다. 그래서 홍우원(洪宇遠)은 <시장(諡狀)>에서 고산선생이 노장서를 멀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고산유고』 권 6, 附. 性不喜馬史如老莊之書一切斥去.

 고산선생의 내면세계에 자리한 도교철학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보다 철학적 차원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먼저 철학적 측면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는 탈속적 삶의 철학부터 검증해 보자.

 그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한 경지가 도가적 삶의 방식 추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 경우 유가의 근독(謹獨)도, 도가의 이물불해기(以物不害己)의 경지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속의 초탈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산거생활은 보다 도가적 경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같은 탈속의 경지는 윗 예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도교철학 중에서도 종교적 측면에 가까운 신선사상이 배어난 문장이다.
 고산선생은 그가 개창한 금쇄동 원림과 그곳의 풍광을 신선의 거소로 치부하고 있다. 고산선생이 매우 현실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고산선생은 철학적 학파로는 ‘理’를 중시하는 주리파(主理派) 성리학자이지만, 이론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문제에 소홀한 여타 학자들과는 괘를 달리했던 것이다. 선생이 성리학자이면서도 예송문제에 있어서는 탈주자학의 길을 걸었다던가,

그의 작품이 오우가(五友歌)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서 보듯이  案앞에서 쓴 명상적 작품이 아니라 철저하게 생활의 실천문학이었다던가, 당시 홀대를 받던 소학(小學)을 수지독송(守持讀誦)했다던가, 간척사업과 원림조경에 뛰어들었다던가 하는 등의 남다른 경향과 풍모는 평소 경세치용 정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산선생은 문학에만 경도되지 않아 경학(經學)에도 밝았다. 비록 퇴계와 율곡처럼 새로운 이론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그의 글들 중에 시의적절하게 인용된 수많은 고서내용을 통해서 경학방면 역시 매우 높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은 하은주(夏殷周) 삼대를 이상으로 삼고 주자학을 통해 공맹(孔孟)이 그렸던 이상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적 사고가 이론중심 일변도로 흐르기 쉬운데 비하여 고산선생은 자기를 포함한 주변에서부터 국가사회에 이르기까지 강한 실천의지를 지니었던 인물이었는데, 특히 노비, 어민, 농민, 빈자 등 여러 방면의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이 높을 뿐 아니라 각 방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높은 전문지식을 갖고서 이론을 폈다. -      -

문학과 연결시켜 본 고산선생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한다면 도(道)가 중심이 되고, 문(文)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즉, 문(文)은 도를 실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기교에만 치우치거나 경박한 쪽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산선생의 이러한 생각은 문예를 공부하는 것은 선비가 아니며,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도 선비가 아니다고 하면서 도(道)를 중시하는 학문을 할 것을 강조하고, 문예는 인간의 성정을 흐리게 하고 세상에 번거러움만 일으킨다고 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산선생의 이러한 생각은 金鎖洞記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즉, 이 집은 정말로 나로 하여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 단 신선이 되도록 하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나로 하여금 부자 군신의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고,  정말로 나로 하여금 물에서 낚시질하고 산을 갈고 하는 흥취와 거문고를 켜고 장고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오로지 하게 하여 종국에는 나로 하여금 옛 선현들의 꽃다운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고 옛날 훌륭한 왕들이 남긴 유풍(遺風)을 노래하게 한다. "

이 글에서 보이듯이 고산선생에게 있어서 흥취라는 것은 자연에 대한 것이든, 예술에 대한 것이든 유학의 도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가치도 없게 됨을 알 수 있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있든, 신선이 되어 있든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가진 父子.君臣의 윤리를 벗어나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愼獨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산선생의 사상이 그러하기 때문에 예술적 표현 역시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이재수(李在秀)가 평한 대로 윤선도는 忠直이란 도덕적 주관을 뚜렷하게 세운 사람이며 이를 일평생 동안 지키면서 살려고 했던 강직한 도학자가 되는 것이다. 고산선생은 어떤 상태에 있어서도 父子.君臣의 윤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선현들의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여러 遺風들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詩는 修身敎科書나 도덕을 가르치는 倫理敎科書 정도로 파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학적 세계관은 그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니, 漁父四時詞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손종흠-

 

 


<참고>
"고산의 문학정신과 그 의의", 해남문화원 주최 세미나 발표, 1996. 및 "고산시가의 도교철학적 조명", 겨레시 운동본부 주최, 제4회 겨레시 세미나 발표, 1991. 11.
원용문, 고산 윤선도의 시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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