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명(神道碑銘)

 

 

   
해옹(海翁) 윤참의(尹參議) 비(碑)   

허문정공목찬(許文正公穆撰)--- 문정공 허목이 쓴 고산 윤선도 신도비명
 

   윤선도(尹善道)의 자는 약이(約而)로 본관은 해남(海南)이다. 4세조는 국자상사(國子上舍) 효정(孝貞)이니, 무갑(戊甲:무오사화, 갑자사화) 이후로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고 스스로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다. 홍문부교리(弘文副校理) 구(衢)를 낳았으니 또한 기묘명신(己卯名臣:기묘사화때 화를 입은 사림)으로 이 사실이 기묘당적(己卯黨籍: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의 약전)에 실려 있다. 교리는 우참찬(右參贊) 의중(毅中)을 낳았으며, 우참찬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유심(惟深)이고 작은 아들은 유기(惟幾)이다. 유심은 벼슬을 부정(副正)까지 하였고 유기는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는데 공(公)은 부정의 아들로 관찰사의 양자가 되었다. 본래의 생모는 안씨이니, 좌의정 현(玹)의 손녀이다.

만력 15년(1587, 선조 20)에 공(公)이 출생하였는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널리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에 있어서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26세에 국자진사(國子進士)에 보임되었으며, 광해군때에는 초야에서 극언으로 상소하기를 '폐행신(嬖幸臣)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며 의정(議政) 박승종(朴承宗)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 버렸다.'고 한 글이 대개 수천마디나 되니, 조야(朝野)가 크게 놀라 아주 변방인 경원(慶源)의 맨 북쪽 2천여리나 되는 곳에 귀양 보내었다. 그 곳은 오랑케와 인접하였는데 무신년 이래로 죄를 얻어 귀양가 있는 자들 가운데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기밀을 가지고 오랑케와 내통한다 하여 모두 남쪽 변방으로 옮기매, 공(公)도 기장(機長)에 옮겨졌다. 이 곳은 동해의 모퉁이로 해가 맨처음 뜨는 곳이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반정(反正)을 하고 나서 옥수(獄囚)를 크게 석방하니, 공(公)도 귀양살이 7년만에 돌아왔다. 여러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전번에 '죄를 입은 사람을 모두 뽑아 쓰자.'는 말이 있었는데 공(公)이 병진년(1616, 광해군 8) 상소에서 김제남(金悌男)의 일을 말한 것 때문에 막는 사람이 있으므로, 장공 유(張公 維)가 말하기를 "형가(荊軻)는 연나라의 수치를 씻으려고 살아 있는 오기(於期)에게 머리를 달라고 했는데 선도(善道)는 간신 이이첨(李爾瞻)을 죽이자고 청했거늘 도리어 죽은 제남을 아끼는가?" 하니 말하던 사람이 그제서야 중지하였다.

무진년(42세)에는 대군(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어 학범(學範)을 엄하게 세워 교훈하되 '소학(小學)'으로서 근본을 삼았으며, 학문을 강론할 때마다 반드시 옛 공자의 득실과 선악을 인용하여 되풀이해서 극진히 하니, 상(인조)이 더욱 어질 게 여겼으며 공자도 또한 더욱 삼가서 존경하고 예우하였다. 사만(仕滿:근무기간이 차다.)하여 옮길 때가 되었으나, 상(인조)이 교훈을 잘했다고 생각하여 5년동안 옮기지 않았다가 임신년에야 옮겼는데, 호조(戶曹)의 좌랑(佐郞), 정랑(正郞),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계유년(4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이 되었는데, 세자의 집에서 유언비어가 나돌기를 "선도가 몰래 모략을 꾸미니 앞으로 세자에게 이롭지 못하리라."하였으므로 공(公)이 이 사실을 듣고 즉시 벼슬을 내놓았다.

갑술년에 성주(星州)를 죄인의 고을이라하여 현(縣)으로 강등하였다. 공(公)이 현감(縣監)이 되었는데 겉으로는 상(인조)의 교지(敎旨)가 있어서 특별히 선임했다고 하나 실제는 마음에 거슬리므로 배척당한 것이다. 이때에 삼남(三南)에서 전답을 측량한 것이 원성이 많았으므로 상소하여 '전정(田政)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에게 너그럽게 하라.'하였다. 당사자가 노하여 공(公)이 죄를 얻게 되었는데 상(인조)이 너그럽게 용서하여 드디어 사은(謝恩)하고 고향에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병자년(50세)의 난리에 공(公)이 변란을 듣고 생각하기를, "국가의 대란(大亂)에 같이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은 없고, 강도(江都: 강화도로 고려 원종때 서울을 이곳으로 옮겨 생긴 이름)는 종사(宗社)가 옮긴 곳이라 모든 공경 대신(公卿大臣)이 많이 가고 있다."하고 따라가려고 하여 향읍(鄕邑)의 자제를 모집하고 가동(家동) 1백여명 정도를 동원하여 배를 타고 대양(大洋)으로 나갔다. 강도까지 수천리나 되어 배로 밤낮없이 매우 빨리 갔는데도, 성은 벌써 수일 전에 함락되고 남한산성도 포위된 지 40여일로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상(인조)이 이미 포위망을 뚫고 동으로 나갔는데 적이 길을 막았다."하니, 공(公)이 생각하기를, "거가(車駕)는 이미 쫒아갈 수 없고 호남(湖南)은 대령산맥(차령산맥)밖에 멀리 떨어져 막혀 있어서 온전할 것이니, 급히 배를 돌려 남방으로 돌아가면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하고 해남(海南)에 이르렀는데, 거가(車駕)가 성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바다에 들어가서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살 만한 작은 섬을 택하여 살았다.

연달아 사도시정(司도시正)과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는데, 대간(臺諫)의 논핵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실제는 죄상이 없으므로 판의금(判義禁) 이덕형(李德泂)이 말하기를, "선도가 먼 곳에 살면서 변을 듣고는 배를 타고 난리가 난 곳으로 달려왔었다. 바닷길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비록 이르지는 못했으나, 충신의 의(義)이다."하니 상(인조)이 빨리 와서 문안하지 않은 것으로 영덕(盈德)에 도배(徒配)하였는데,  1년만에 돌아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유유자적하게 금쇄(金鎖) 문소(聞蕭) 같은 곳에 정착하니 다 산수가 아름다운 바닷가이다.

갑신년(58세)에 상(인조)이 병을 얻자 태의(太醫)가 상(인조)에게 아뢰어 불렀으나 공(公)이 병 때문에 가지 못하고 상소하기를, "마음은 한 몸의 주장이 되므로 장부(臟腑)· 규맥(竅맥)· 기혈(氣血)· 음양(陰陽)의 역순성쇠(逆順盛衰)가 다 마음에 매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면 곧 몸도 평안해서 풍한(風寒)· 서습(署濕)· 귀매(鬼魅)· 백사(百邪)가 저절로 들어오지 못하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면 곧 이것과 반대로 됩니다." 하고, 이어 약석(藥石)으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호할 것을 비유하였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소현(昭顯)이 죽으매 큰 옥사가 있어 세 왕손을 제주에 귀양보냈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효종(孝宗)이 즉위하니, 시열(時烈)과 준길(浚吉)이 오랑캐를 정벌하여 복수하자고 상(효종)의 뜻을 움직여 드디어 용사(用事)하니, 공(公)이 다시 상소하여 '몸을 닦고 도를 닦아 왕손을 너그럽게 용서하여야 된다.'는 일을 현도에 올렸으나, 감사(監司) 이시만(李時萬)이 올리지 않았으므로 공(公)이 아들 인미를 시켜 정원(政院:승정원의 약칭))에 올리매, 정원이 기각하려다가 얼마뒤 올리니, 상(효종)이 마음을 기울여 답하기를 '직접 당언(바른말)을 듣고자 한다.' 하였다. 용사자(用事者)들은 상(효종)의 뜻이 공(公)에게 있음을 알고 다시 불러들일까 두려워 백계(百計)로 막았으나 상(효종)의 뜻은 삼사관직(三司館職)에 쓰고자하니, 전선(銓選)을 맡은 사람이 사예(司藝:성균관 정4품)도 관직이라 하고, 드디어 제수하였다.

상(효종)이 특별히 부르니 도성문밖에 이르러 상소하여 죄를 청하고 물러가기를 빌어 마지 않았으나 상(효종)이 바로 공(公)을 불러들여 특별히 승지(承旨)를 제수하여 늘 경연(經筵)에서 모시도록 하니 용사자들이 공(公)을 더욱 꺼렸으므로 또 상소하여 강력히 물러날 뜻을 말하고 드디어 떠났다. 상(효종)은 생각하기를 '음계(陰計)에 밀려났다.'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힘써 만류하여 특별히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다시 모진(冒進)할 뜻이 없음을 말하고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것을 빌었다. 또 시폐8조(時弊八條)를 올렸으며, "공신 원두표(元斗杓)가 제마음대로 처사하니 재억(裁抑)하여 공신을 보전케 하소서."하였다.

김자점(金自點) 송시열(宋時烈) 원두표(元斗杓)가 각각 당(黨)을 세우고 권세를 다투다가 점(點)은 패사(敗死)하고 표(杓)는 시열(時烈)에게 붙었는데, 이때 두표(斗杓)를 편든 사람들이 선도를 논핵하여 벼슬을 빼앗고 내치자고 하니, 상(효종)이 처음에는 허락했으나 곧 다시 서용하였다. 이때에 용사자가 도민(島民)과 연해(沿海)의 모든 어부를 다 강도(江都)에 차출하여 여러 성루(城壘)를 쌓자고 의논하였고, 또 양전(量田) 호패(號牌)의 의논이 있자 사방이 소요하였으므로 공(公)이 불편함을 극진히 말하니, 상(효종)은 총답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도민의 성 쌓는 일은 상(효종)이 특별히 파했고, 연해의 어부들을 옮기는 일도 역시 이의가 많아서 옮기지 않았다. 병신년(70세)에 또 교지에 응하여 정치의 폐단을 논한 것이 수천 말이나 되었다.

정유년(70세)에 왕후가 병이 있자 공(公)을 경사(京師)에 불러 올려서 상(효종)이 특별히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제수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상의(上意)는 움직이기 어렵다'하여 헐뜯는 말이 날로 심해지니, 공(公)이 진정하여 파직시켜 달라는 소를 열 번이나 정원에 올렸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공(公)이 그 옹폐(擁蔽)한 것을 말한 뒤에야 소가 올려졌다. 공(公)이 떠나기를 청하여 마지 않으니, 상(효종)이 마침내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이 정개청(鄭介淸)의 일을 추무(追誣:지난 일을 죽은 뒤에 무고하는 것.)하여 그의 사당을 헐게되자, 공(公)이 또 상소하여 극진하게변명해주니 시의(時議)가 사설(邪說)이라고 지적하여 상(효종)에게 아뢰어 소를 물리치고 더욱 공격하였으므로 공(公)은 드디어 파직되었다.

다음해 효종이 41세로 승하하매 좌상(左相) 심지원(沈之源)이 상(현종)에게 아뢰어, 산릉(山陵)의 일에 대해 불러 의논하여 수원(水原)에 복길(卜吉: 좋은 곳을 가려서 정함)하고 나니, 시열과 준길이 노하기를, "능을 정하는 것은 큰일이니 선도의 말만 들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드디어 고쳐 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공(公)이 쫒지 않으니, 곧 불경이라 논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으되 상(현종)이 듣지 않았다. 공(公)이 사사로 이르기를 '뒤에 반드시 능을 옮기는 변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런 뒤 15년(현종15, 1674년)에 산릉이 안에서 무너져 여주(驪州)로 개장(改葬)하였다.

전년 대행(大行)의 상(喪)에 태후(太后: 효종의 계비 자의대비 조씨)는 마땅히 장자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데 시열과 준길이 체이부정지설(體而不正之說)을 고집하고 또 단궁지문(檀弓之免)과 자유지최(子遊之衰)를 인용하여 기년으로 내려 정하니, 공(公)이 상소하여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은 나누어 둘로 할 수 없다.'하여 강개(慷慨)하기를 더욱 간절하게 하니, 상(현종)이 어렵게 여겨 결정을 못하였다.

이에 다들 '선왕(先王)을 범(犯)하고 현자(賢者)를 무함(誣陷)한다.'하여 상(현종)의 마음을 노하게 만들어 법으로 처단하게 하니, 상(현종)이 명하여 삼수(三水)에 안치(安置)시켰다. 이곳은 북쪽 끝으로 삼강(三江) 허천(虛川) 읍루(읍婁)의 옛 땅이었으며 뒤에 말갈(靺鞨)이 되었는데, 산과 못은 일찍 얼어붙고 오곡(五穀)은 생산되지 않으며 청강(靑江) 밖에는 파저(婆猪: 만주인) 잡종이 예부터 살고 있었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의 유계(兪棨)라는 사람이 상(현종)에게 아뢰어 소를 불태워 버렸다.

신축년에는 가뭄이 들어 북청으로 옮기려 하는데 시열과 준길이 막아서 결국 옮기지는 못하니, 판중추(判中樞) 조경(趙絅)이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받들어 상차(上箚)하기를, "선도가 무슨 죄입니까? 선도의 죄는 종통 적통을 말한 것이니, 효종을 위하여 좌단한 것입니다. 선도가 소를 드리던 날에 누가 전하에게 소를 태우자는 계책을 내었습니까? 고려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워 버렸고 전번에 광해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는데, 국사와 야사에 쓰기를 만약 "아무 조정 아무 때에 윤선도의 '예를 논한 소'를 불태웠다. 한다면 성조(聖朝)의 누(累)가 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경(絅)을 삭탈관작하고, 공(公)은 죄를 가중시켜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계묘년(77세)에 교리 홍우원(洪宇遠)이 또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설을 극진히 말하면서 '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하니, 홍우원마저 금고에 처하였다. 을사년(79세)에 또 가뭄으로 인하여 공(公)을 광양(光陽)에 옮겨 귀양보내니 또한 남쪽 바다끝 바닷가로 풍토가 심히 나빠서 난환(難換)과 기괴한 병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9명은 죽었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러자 상(현종)이 그가 오랫동안 죄입은 것을 생각하여 풀어주려고 대신에게 물으니, 다 석방하라하고 오직 수상(首相) 홍명하(洪命夏)만 안된다고 하였으나 상(현종)이 특별히 석방하였다.

공(公)이 사면(赦免)되어 나와서 바로 바닷가를 거닐면서 글을 읊어 산중신곡과 어부사를 불렀다. 바닷가로 간지 5년이 되던 해에 85세로 공(公)이 별세하니 현종 12년(1671) 6월 11일이다. 고향인 문소(聞簫)에 귀장하니 치명(治命: 죽을 즈음에 맑은 정신으로 하는 유언)을 쫒은 것이라 한다. 그 다음해에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3년 뒤에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비 장씨)가 승하하였는데 태왕태후는 인선왕후가 첩자부(妾子婦: 서자 며느리))라 하여 대공복(大功服)을 입으려 하므로 유생(儒生)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고례경문(古禮經文)은 그렇지 않다.'하니 상(현종)이 깨닫고 이에 경문을 친히 고찰(考察)하며 경자년(현종 1년, 1660)에 윤선도의 '예를 논한 소'를 명하여 들여오게 하였으나 벌써 대궐 아래서 불태워 버렸고 실록(實綠)에도 올리지 않았으므로 들여오지 못하였다.

상(숙종)이 즉위하여 예를 논하다 죄를 얻은 모든 신하를 불러 등용하게 되자 송시열을 북변에 안치하려 하매, 용사자가 덕원(德源)도 북변에 있는 고을이라 하여 덕원에 안치하였다가 뒤에 웅천(熊川)에 옮겨 안치하니 수상(首相) 허적(許積)이 말하기를,"웅천은 병이 심한 고을로 여기에 안치함은 살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하여 또 장기(長기)로 옮겼다.

이유정(李有湞)의 사건이 있자 송시열을 거제(巨濟)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고, 송준길은 이미 죽었으므로 삭탈관작하니, 나라의 예가 바로 잡혔으므로 마땅히 종묘에 고하고 반교(頒敎)하려 하였으나, 허적(許積)에게 방해받아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고 공(公)은 마땅히 의정(議政)으로 추작(追爵)하여야 하나 적(積)이 또 옳지 않다하여 이조판서로 강등하였으며, 태상(太常)이 의논하여 충헌(忠憲)이라 시(諡)하였는데 상(숙종) 6년(1680)에 허적(許積)이 패사하고 송시열의 제객(諸客)이 다시 진출하여 시열은 작위를 회복하고 공(公)은 추증(追贈)한 작위와 내려준 시호를 삭탈당하였다.

공(公)은 준정(峻正)하여 인의(仁義)를 많이 쌓아 널리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사곡한 예와 변변치 못한 은혜로 명예를 바라거나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아서 환난궁액(患難窮액)에 한결같고 바른 도리 때문에 배척을 당해 죄수명부에 있은 지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 만큼 정당하여 비록 아홉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의를 봄이 밝고 죽음으로서 지켜서 바꾸지 않는 이가 아니고서야 능히 이같이 하였겠는가!

또 집에 거처하면서 가정을 가르치는 것을 상고해 보면 의식(儀式)에 잘못됨이 없고 남녀와 내외의 분별을 더욱 근신하되 곡례(曲禮) 내칙(內則)의 가르침과 같이 하였으니, 풍속을 더럽히고 교육하지 않는 일에 경계(警戒)됨이 또한 크다 하겠다.

용주(龍洲)는 말하기를,"예부터 나라가 흥하거나 망할 때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사람을 내어 예를 지키고 의에 죽게 하여 한 세대를 깨닫게 하며 후인을 가르치게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공(公)이 바닷에 들어가 늙게 되자 사람들이 해옹(海翁)이라 호(號)하여 한때 다들 이렇게 불렀으며 혹은 고산선생(孤山先生)이라 하니 고산은 바로 나라의 동쪽 교외 강가에 있는 구업(舊業)이다.

묘명(墓銘)은 다음과 같다.

비간(比干)은 심장을 쪼갰고 백이(伯夷)는 굶어 죽었으며 굴원(屈原)은 강물에 빠졌는데 공(公)은 궁하면 더욱 굳으며 죽게 되어도 변치 아니하였으니 의를 보고 죽음으로서 지킨 것은 동일하다. 정부인(貞夫人) 윤씨(尹氏)는 본관이 남원(南原)인데 판서(判書) 돈(暾)의 딸로 또한 부덕이 있어 한 집안이 모두 어질다 칭찬하였다. 정부인은 공(公)보다 1년 뒤에 태어났고, 17년 전에 69세로 죽었다. 무덤은 전에 바닷가 수정동에 있었는데 공(公)을 장사지낼 때에 이르러 고향인 문소에 옮겨 합장하였다. 장남 인미(仁美)는 또한 학식이 많기로 알려져 명성이 있었다. 공(公)이 삼수에서 귀양살 때 급제하였으나 분관(分館)에서 빈척(빈斥)되어 13년을 금고받고 공(公)이 죽은지 4년 뒤(현종 15, 1674)에 죽으니, 금상(숙종) 3년(1677)에 이르러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추작(追爵)하였다. 차남 의미(義美)는 진사로 일찍 죽고, 또 삼남은 예미(禮美)이다. 두 딸이 있으니 사위는 심광면(沈光沔)과 이보만(李保晩)이다. 서출녀(庶出女)가 3인이니 직강(直講) 이익로(李翼老)의 첩과 황도빈(黃道彬), 양헌직(楊憲稷)의 처이다. 인미의 아들 이석(爾錫)은 상이 특별히 이산현감(이山縣監)을 제수하였고 의미의 아들 이후(爾厚)는 금년에 국자생원(國子生員)으로 새로 보충되어 선인(先人)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부탁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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