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선생의 음악관

 

 

 


   고산선생은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고산선생과 음악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고산선생은 거문고의 명수인 권해(權海)를 퍽 좋아했다. 고산선생은 음악을 감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곡도 하였다. 단지 여느 사대부들처럼 연주만을 즐긴 것이 아니라 고산선생은 직접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선생이 손수 원림을 조영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고산선생에게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였던 곳이다.

고산선생은 보길도 생활에 대하여

"이곳이 비록 해도라고는 하나 천석이 매우 뛰어나 참으로 물외의 아름다운 곳이어서 나의 삶을 마치기에 족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한가히 거닒에 <운곡기>에 말한 바, "산수간에 밭갈고 낚시질하며 본성을 기르고 책을 읽고, 거문고 타며 장구치고 선왕의 유풍을 노래하니, 즐거움에 죽음도 잊을만 하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생각이 강과 산에 이르면 잠깐씩 북과 피리로 마음을 달래고 눈물을 참으면서 애를 태운답니다. 그럴때에는 다시 언덕을 넘고, 골짜기을 찾고, 물가에 쉬기도 하고, 먼하늘을 바라보기도 하지요,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대나무에 기대고, 물고기를 보고, 갈매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이런 시름을 잊어본답니다. 그리하여 옛날 산과 바다를 찾은 자 마음조차 없지는 않았으리니 모두 때를 잘못 만나 꿈을 펴보지 못하여 세월을 탓하고 세상을 한탄하며 슬픈 빛 울적한 마음 없앨수 없이 산수의 낙으로써 세상 마음 잊으려 했을거요."라고 하였다.

보길도 세연정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시(詩) 가(歌) 무(舞)를 즐기게 된 연유를 보면

고산선생은 가무(歌舞)를 하는 이유를 "예기(禮記)에는 '13살에 음악을 배운다'고 하였고, 소학(小學)의 제사(題辭)에는 '읊조리며 노래하고 춤춘다'고 하였고, 이천(伊川)선생도 또한 '가르치기를 가무로써 하면 어린애들이 배운다 '고 하였으니, 모두 옛 성인들의 음악에 담긴 그 속뜻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 된 연후에야 음악을 할 수 있다면 성인이 어찌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이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것은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동양 고래의 유교적 예술철학인 『예기(禮記)』<악기(樂記)>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이 반영되어 있다. 시(詩) 가(歌) 무(舞)가 모두 마음으로 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고산선생에게 있어서 노래소리(歌)와 춤의 자태(舞)는 시(詩)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마음을 닦고 시정을 더욱 깊고 오묘하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는 “하루도 즐겁게 놀지 않으면 심성을 수양하며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산선생은 음악을 즐기는 이유는 "그것이 기쁨을 돕는 소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소용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음악으로부터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和莊寬密中正之義)"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말속(末俗)에서는 음악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기쁨을 돕는 것인 줄만을 알고 있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번거로운 소리만을 즐겨듣고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루한 사람들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병통인 것입니다."라고 하여 우려를 나타내었다.

또한 "소리라는 것은 천기의 유동에서 나온 것이며...만일 주흥으로 노래하고 항상 춤추어서 방일에 빠져 돌아오기를 잊는다는 것 때문에 경계하느라 없애버린다고 한다면, 거의 목이 메인다고 밥을 먹지 않고 국이 뜨겁다고 나물을 불어 먹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희음을 고요히 듣고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생각함으로써  즐거우나 방일하지 아니하고 서러우나 마음 다치지 아니하며 서두르지도 아니하고 게으르지도 아니하는 뜻을 얻는다면 그 배우는 이에게 유익함은 예나 이제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고산선생이 지은 산중신곡이 뒷날 노래부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불러지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산유물관에는 아속가사(雅俗歌詞)와 고산유금(孤山遺琴)과 회명정측(晦暝霆側)과 낭옹신보(浪翁新譜) 등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고산선생이 거문고로 금가금시(琴歌琴詩)를 직접 작곡하고 연주를 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 아속가사(雅俗歌詞) :
   고산선생이 우리나라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의 가사를 모아 엮어 놓은 책.

*. 고산유금(孤山遺琴) :
   고산선생이 직접 제작하여 사용했던 거문고. 거문고에 쓰인 "고산유금"이라는 글씨는 선생의 4세손인 낙서
   윤덕희가 새긴 것이다.

*. 회명정측(晦暝霆側) :
   거문고의 제작과 사용방법을 수록해 놓은 책.

*. 낭옹신보(浪翁新譜) :
   거문고의 명수인 김성기(金聖基)의 거문고가락을 채보한 악보로서, 김성기의 아들과 그의 제자들이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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