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의 원림

 

 

 

                                              
   고산선생은 보길도와 금쇄동(문소동, 수정동 포함)에 원림을 직접 조영하였는데, 고산선생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 화려함을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막상 이 원림을 대하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된다. 유적지에는 순수자연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의 생활공간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림의 뜻을 이해하고 대자연에 몰입하여 고산선생을 느끼게 되면 비로서 그 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고산선생은 "사군자의 처세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두 가지 길일 따름이니, 조정이 아니면 산림이라 한 것은 곧 고인의 말입니다. 제가 이미 병이 들어 세로에서 행세할 수 없으니 수석에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지 아니하고 다시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자가 운곡[에 들어가고] 이자현이 청평[에 들어가며] 최고운이 가야[에 들어간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가자 한퇴지는 서를 지어 찬양했고, 유지지가 여산에 살자 구양수는 시를 지어 훌륭히 여기었으니, 내가 어찌 이원과 여지지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당세인이 어찌 구양수와 한퇴지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림(園林)이란 순수자연은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원(庭園, garden)과 다르다. 

 

 

 

   조선 중기부터 중국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조선유학의 자주적 자각의식이 태동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관심과 태도에 있어서도 이전까지의 관념에 더해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이 대두되었으며, 고산선생은 질적·양적으로 그 같은 변화를 수용한 대표적인 원림조영의 실천가이다.

고산선생은 당시 여타 선비들과 구분되는 성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탁월한 예술적 소질과 감성의 소유자란 점이고, 둘째 자연에 대한 특별한 애호와 성벽을 숨기지 않고 토로하면서 적극적으로 찾아 즐기려는, 관념에 머물었던 당시 선비들과는 다른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자세를 지녔으며, 세 번째 당시 사상적 한계를 뛰어넘는, 유불선을 포용하는 열린 태도와 편력, 그리고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시각으로서 천문, 지리, 의학을 위시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폭넓은 조예와 그에 입각한 실학적 자세를 견지하였다는 점 등이다. 선생의 원림들에서 당시의 유교적 관념을 뛰어넘는 자연 경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원림에 대한 적극적인 예술적 활동과 체험이라는 점이 유달리 부각되는 것은 이같은 선생의 독특한 개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보길도와 금쇄동, 문소동, 수정동에 조영한 고산 선생의 원림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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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림조영배경

.  고산선생이 원림을 조영한 배경으로는 자연애호의 성정과 당시 정치 사회적 역경으로 인한 피세 의식이 산림 속 은둔생활로 수신하고 성정을 함양하려는 고산의 의식과 부합되어 실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또한 원림을 자연 속 경승지에 조영한 것은 자연과 친화된 서정을 향유하고 그를 통한 자연과의 합일적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각 원림 유구와 기록에는 고산선생이 지향한 별세계로서의 선경(仙境)과 관련된 내용이 많이 발견된다.

원림조영방식 및 접근태도

.  고산선생은 빈번한 근유를 통해 경승지를 찾아내고 순수자연은 그대로 둔 채 최소한의 인위적 조성을 추가하여 원림조영을 마무리하였다. 이것은 자연을 거의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자연과의 합일과 동참을 추구하려는 의도와 가치관이 원림조영에 중요한 이념적 가치이었음을 의미한다. 추구가치와 결과적 양상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특질은 현대의 생태적 조경설계가 표방하는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고산 원림의 중요한 생태적 본질이기도 하다.
.  원림을 조영함에 있어 고산선생은 현장답사와 장소 안에 거주하기를 통한 격물치지적 자세에 의한 대상 이해를 토대로 신의적 창의에 의거하여 원림을 조영하였다. 이 것은 현대 생태적 설계에서 주장하는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대상(생태)의 속성을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심미적으로 창조해 내려는 고산선생의 접근태도를 알 수 있다.
.  고산선생이 조영한 4개소 원림 모두는 기존 경관을 기반으로 하면서(선경:選景), 주변 경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의경:意景), 빼어난 경물을 끌어오고(차경:借景),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는 근유(近遊)로 즐김으로써 완결되는 구도를 갖는다.
.  선계를 표방하기 위해서 공간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높은 장소를 골라, 시각과 미기후적 요소를 활용하여 비인간적 지경을 상징하고, 도교적 이름이나 공간적 장치로 선계적 구도를 강화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  고산선생은 원림을 일시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건물과 정원요소를 추가해 가면서 조성하였다. 이는 주변환경에 대한 점진적 이해와 자신의 생애주기 및 개발시기를 연계시킨 것으로서, 생태적 의미와 문화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특징이기도 하다.

원림 이용 및 체험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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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선생은 원림을 조성한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빈번한 유람과 탐승을 통해 체험하고 그 경험을 시, 수필, 음악 등으로 노래함으로써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고산 원림에서 미적 경험은 관조를 넘어 참여의 경지를 추구하여 자연현상과의 미적 만남과 상황적 경관에의 동참이 이루어졌다. 이는 현대의 생태적 조경설계에서 추구하는 예술적 감성의 수용과 표현에 비견할 만한, 고산원림의 중요한 생태 문화적 의미라 할 수 있다.
.  자연의 속성에서 유추된 의미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고산선생은 시적 상상력을 동원한 은유와 상징적 구도를 채택하고 즐겼다. 그 속성도출은 철저한 관찰과 치밀한 분석 묘사에 근거함으로써 오늘날의 생태적 태도와 비견된다. 시적 상상력과 은유적 표현 역시 현대 생태적 조경설계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설계도구(기법)이다.
.  고산선생은 연동 종가를 중심 거점으로 하면서 해남의 수정동/문소동/금쇄동의 3개 원림과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을 비슷한 시기에 조성하여 일종의 별서로 동시에 운영하되 이들을 번갈아 오가며 이용하고 원림체험을 심화하였다.
.  원림의 이용구도는 각 원림 중심의 근유(近遊)와 원림들간의 상대적인 원유(遠遊)라는 2중적 구도로 이루어지는데 각 원림 주변 근유가 그 원림에서 머무는 기간에 이루어졌다면 원림들간의 근유는 고산선생 일생 생애에 따라 비교적 긴 주기로 이루어졌다.
.  고산선생이 조영한 원림은 원림 내를 유람하듯 다니며 감상하는 동적 체험구도를 지닌다. 이 것은 유(遊)를 통한 체험을 중시한 고산 원림의 특징과 잘 부합된다.

   비록 고산선생이 산수간을 찾아 원림을 조영한 계기는 당시 자신의 정치·사회적 처지와 함께 자연애호의 성정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조영과정을 보면 빈번한 답사와 현장에 거주하기라는 생태적 접근 태도가 개재되어 있다. 그 같은 접근태도와 자연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대상이 되는 자연물의 속성과 가치에의 이해로 연결되어 고산선생의 독창적 해석을 통해 예술적 체험으로 승화되어졌다. 그와 아울러 고산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실용적 사고는 원림현장에서 과학적 실체로 구체화되어졌다. 결과적으로 고산 원림은 자연에 대한 이념과 가치가 예술적 감성으로 표출된 곳이면서, 과학적 태도와 기술이 실현된 현장이기도 한 곳인 셈이다. 고산 원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생태 문화적 특질은 점진적인 개발이라는 시간개념에 관련된 것이다. 각 원림의 공간과 시설을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조영해 나가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대상 장소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와 인식의 심화를 자신의 생애 주기와 연계시키면서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에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생태 문화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원림조영에 나타난 배후 사상

   원림조영의 직접적인 동기는 출처지의를 중요시하는 유교적 생활철학이었으며, 원림 조성과 경영의 배경에 작용했던 것은 도가사상이었다. 성현의 행적이나 학문, 언행과 관련된 요소들을 원림에 적용한 것은 삶의 가치와 사상적 기준을 그들에게서 찾으려 했던 상고주의(尙古主義) 정신의 발로이며, 선계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신선사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원림의 터를 잡을 때 지세와 방향을 따져 명당수를 조성한 것은 풍수사상의 영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원림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흐름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한국적 자연주의 사상이라 할 것이다.

-. 유교사상
    유교철학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치와 생활의 근본이념이었으며, 특히 출처지의(出處之義)는 선비된 사람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굳게 믿었다. 출처지의란 선비가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관인의 입장에 있을 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힘쓰지만, 세상이 자신의 이상을 받아주지 않으면 관직에서 물러나 처사의 입장에서 대의와 명분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향리의 별서나 원림은 유교사상을 고스란히 담아 선비된 도리를 지키며 수신하는 은거지로써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들은 이 은거지에 머물러 있으면서 풍진에 찌든 바깥세상을 백안시하며 스스로의 고답(高踏)을 추구하였고, 정신적인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상적 생활공간이었다.

-. 성리학적 요소
    성리학과 관련된 요소들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도처에 나타나 있다. 우선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연못을 들 수 있다. 이 연못은 외곽이 사각형인 연못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꾸며 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 형태의 연못은 우주의 생성과 구조의 원리 즉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밖에 원림 속에 경물이나 차경 수법에 의해 정원에 포함된 산, 바위 등 자연물에 붙여진 이름, 건축물의 당호나 편액의 내용등에서도 성리학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보길도의 주 봉우리를 격자봉이라 이름한 것은 성리학의 격물치지 개념과 주자의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연결시킨 것이고, 낙서재 뒤쪽 바위를 소은병(小隱屛)이라 한 것 등이다.

-. 도가사상
    도가사상은 노장사상의 핵심인 도(道)와 무위(無爲)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옛 선비들은 내심없이 고요한 상태로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고, 시정(市井)의 세속보다 산림,전원,강호의 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낙으로 여겼던 것이다. 특히 정치적, 시대적 상황의 변화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낙향하여 은거할 경우에는 도가적 성향을 드러내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택했다. 즉 무위의 법도를 체득하고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도가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신선사상
   현실적인 제약이 자신을 강하게 억누를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생을 구가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현실에서 불로불사의 추구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도교에서는 그 여러 가지 해결방법 중에서 충효, 인신(仁信)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선을 쌓고 공을 세워 득도하면 선인(仙人)이 될 수 있고, 선인이 되면 불로불사할 수 있다는 등의 윤리, 도덕의 실천을 통한 영생의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도교에서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곳은 기본적으로 산이며, 동천석실은 도교에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 풍수사상
   풍수는 음양론과 오행설을 기반으로 땅에 관한 이치, 즉 지리를 체계화한 전통적 논리구조이며, 주역을 주요한 준거로 해서 길한 것을 추구하고 흉한 것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풍수사상은 도읍이나 마을 터를 정할 때는 물론이고 원림의 터잡기, 나아가서 건물이나 정원수의 배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결국 길한 터를 점지하고 그 터를 명당화함으로써 가문의 부귀와 자손의 번창을 추구하려는 전통적 기복사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윤위의 보길도지에도 부용동원림이 길지명당임을 설명하고 있다.

- 예악사상
   보길도 부용동 세연정 지역은 고산선생이 마음을 다스리던 장소로써, 시와 노래 그리고 춤이 어우러진 예술철학의 공간이었다. 유가(儒家)에서는 난세를 극복하고 치세를 이루고 싶은 오랜 소망에서 예악(禮樂)을 주장해 왔다. 고산선생은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예악사상(禮樂思想)을 몸소 실천하며 사회적 현실에 회의를 느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이곳 세연정에 유독 무대(舞臺)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악사상을 반영시켰기 때문이다.
   고산선생은 '예악은 항상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예기』「 악기」의 예악사상을 실천하면서  "말속(末俗)에서는 음악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기쁨을 돕는 것인 줄만을 알고 있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번거로운 소리만을 즐겨듣고,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和莊寬密中正之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루(鄙陋)한 사람들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병통인 것입니다."라고 우려를 나타내었다.
   또한 공사(供辭)에서는 "제 평생의 성벽이 본디부터 산수에 있었으며, 들어갔던 섬에는 천석이 절승하여 귀신이 깍아 세운 듯 하니 인간세상의 이목으로는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심히 사랑하여 흥을 의탁하고 시름을 잊어 종로(終老)의 계교로 삼으려 했습니다...강과 산에서 날라리와 북으로 멍울진 마음을 달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참지만 창자는 찟어질 듯 아픔니다.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찾아 물가에 쉬면서 물에 씻겨 반들거리는 돌을 하염없이 바라 보고 소나무를 어루 만지며 대나무에 기대어 서는 것은 가슴 속에 뭉쳐있는 답답한 마음을 씻어 버리려는 까닭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답인서정축(答人書
丁丑)에서는 "이곳이 비록 해도라고는 하나 천석이 매우 뛰어나 참으로 물외의 아름다운 곳이어서 나의 삶을 마치기에 족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한가히 거닒에 <운곡기>에 말한 바, '산수간에 밭갈고 낚시질하며 본성을 기르고 책을 읽고, 거문고 타며 장구치고 선왕의 유풍을 노래하니, 즐거움에 죽음도 잊을만 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출처 :『조경설계에 있어서 '생태-문화' 통합적 접근에 관한 연구』- 성종상 -
        :『한국의 정원』「선비가 거닐던세계」 - 허균 -
        :『고산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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