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윤선도 녹우당유적지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선생의 4대 조부인 어초은
(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님이 해남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고택이다. 그리고 효종(孝宗)께서 고산선생에게 하사한 수원집의 일부를 해남으로 귀향하면서 길이 간직하기 위하여 그 일부를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 원래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으며,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추원당과 옆 터에는 고산선생을 비롯한 선조들의 문적(文籍) 문서 및 고화(古畵) 등을 고루 갖추어 놓은 고산유물관이 있다.
   



 

문화재 상세정보
 

 

 

종   목  사적   167호
명   칭  해남윤씨녹우단 (海南尹氏綠雨壇)
분   류  사묘,제단
면   적  14,268㎡
지정일  1968.12.19
소재지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사유
연혁
   - 전시관 신축공사, 옥외 시설물공사,
     기계 설비공사   [1988.07.10~1989.02.28]
   - 녹우단 보수, 녹우단 문간채 보수                             [1995.06.19~08.14]

   - 추원당 보수, 차양 보수                
                            [1996.07.29~11.29]

   해남 윤(尹)씨 녹우단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선생의 고택이며 현재 고산사당 및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고택이 모두 잘 남아 있고 여기에는 가전고화첩(家傳古畵帖) 및 윤고산 수적(手蹟), 관계문서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선조(宣祖) 20년(1587)에 출생하여 현종 12년(1671)에 죽었으며 조선왕조 중기의 시조 작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경사백가(經史百家) 에 통달하였고 의약, 음양지리에도 정통한 학자였다. 사화(士禍)에 의해 유배 당하기도 하였으나 효종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傳)가 되기도 하였으며 사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주택은 서향하여 대문은 남쪽에 남향하고 있다. 안채는 세칸의 대청과 그 북단에 서향하는 두칸의 마루방이 있고 마루방 서쪽에 작은 온돌방이 두칸 계속되어 안방이 되고 그 끝에 큰 부엌이 연결된다. 대청의 남단에는 한칸의 웃방이 있어 서절(西折)하여 작은 부엌 그리고 두칸의 건너방이 연결되고 그 끝은 개조된 창고가 있으나 원래는 마루가 놓인 광 인듯하다. 사랑채는 안채 앞에 있으며 역시 서향하여 남단에 두칸의 대청 그 옆에 두칸의 온돌방이 계속되고 이 온돌방 옆에 서쪽으로 돌출한 작은 온돌방이 있어 그 옆에 다시 한칸의 대청이 있고 이들 앞에는 마루가 달렸고 돌출한 온돌방 뒤에 아궁이가 있다. 사랑채 서쪽에는 작은 못이 있고 그 앞에는 개조된 창고가 있고 그 남쪽 끝에 온돌방 두 개와 부엌이 있어 하인들의 거처였던 것 같다.
   이 집 부지(敷地)는 매우 넓고 안채 뒤쪽에 큰 대밭이 계속되고 부지 동남 귀쪽에 안 사당 즉 선조의 신위를 봉사(奉祀)한 사당이 있으며 외장(外牆) 바깥에 고산사당과 중조(中祖)인 윤효정(尹孝貞)의 사당인 어초은사당은 역시 담장을 돌렸으나 한칸 문에 정측면(正側面)이 단칸으로 된 건물이다. 이밖에 동북쪽에 떨어져 어초은의 제실인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북쪽에 좀 멀리 떨어져 고산제실인 녹우당(綠雨堂)이 있다.
   이 유구(遺構)는 근세의 선비 주택 시설을 고루 잘 갖추었고 고산선생을 비롯한 고인들의 문적(文籍) 문서(文書) 및 고화(古畵) 등을 고루 갖추어 근세의 주택사 뿐만 아니라 사회사, 미술사, 문학사 등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남아있다.(문화재청)
 


연혁

1968 문화재(사적지 제167호)로 지정
1979 고산유물전시관(42평)건립, 유물 500여점 전시
1986 해남군에서 고산유적관리사무소 설치, 유적지관리 1991 신유물전시관(114평) 건립, 유물 4,600여점 전시




 


녹우당

  
- 대표적인 전통고가 녹우당

   녹우당(綠雨堂)하면 해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전통고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하루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와 고택과 해남윤씨가가 남긴 유물들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녹우당 앞에 들어서면 먼저 5백여년 된 은행나무가 이 집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듯 찾는 이를 압도한다. 해남윤씨가의 역사를 혼자서 묵묵히 지켜본 나무다.

연동마을의 녹우당이 처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님이 600여년전인 1501년 덕정동에서 友愛堂이란 집을 짓고 사시다  당시 도강 김씨와 탐진 최씨들이 세거(世居)해 살던 현재의 마을 터를 사들여 이주하면서 부터이다. 처음의 집자리는 현재의 사랑채 남측의 빈터였으나 2차례에 걸친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어초은공의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하여 좋지 않으니 현재의 안채 자리로 옮기고 물을 만들어 흰 연꽃을 심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어초은공이 연못을 만들자 이후로 화재가 없었다고 하며, 이곳의 지명도 백련동(白蓮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고산선생까지 5대에 걸쳐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일대의 명문가문으로,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하게 되었고, 급제한 종손들은 서울에 자리잡고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해남의 재산은 부재지주로서 관리하게 되고, 종가인 녹우당은 아직 소박한 시골집으로 있었다.그러나 남인 세력의 선봉이었던 고산선생은 당시의 격변하는 정치상황에 회의를 느끼자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해남으로 귀향하게 된다. 이로써 녹우당은 고산선생에 의하여 한차례 변화를 거치게 된다. 수원으로부터 사랑채를 옮겨오고, 마을 입구의 백련지를 보다 큰 규모로 개수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정치에 뜻을 접은 윤두서의 귀향과 종손들의 대이동 이후에 녹우당은 본격적인 살림집으로 집을 개수하게 된다.
그 이전에 있었던 종가집은 재실 형태의 건물이었으며, 1821년 가묘 중건을 시작으로 3개의 사당이 중건되고, 19세기 말에는 행랑채를 신축하고, 1938년에 녹우당 뒤에 있는 재각인 추원당을 신축함으로써 주요한 건축과정을 마무리 짓는다. 길게는 400년 간, 본격적으로는 200년 간에 걸친 오랜 증축과 개수의 과정을 겪은 결과가 현재의 녹우당이며, 지금도 녹우당의 내부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집을 지을 때 집터를 잘 잡아야 집안이 번성한다고 하여 이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이곳 연동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로 꼽고 있다.
연동의 형국은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 玄武)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 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말매봉,

문필봉)이 원경(朝山)으로 펼쳐져 있어 풍수가 수려한 형국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이 너무 넓고 막힘이 없어서 허해짐을 막으려고 작의적인 안산(案山)으로 동산과 연지를 만들어 조성한 원림이다.진산과 안산을 잇는 지형체계의 자연축이 동서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녹우당의 구성축도 동서로 놓인다. 동서축선상의 앞으로는 맘무덤과 연동마을이, 뒤로는 재실과 입향조의 묘소가 놓인다. 동서축은 마을과 종가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간적 위계를 정하는 매우 중요한 축선이다. 여기에는 일상적인 기능보다는 공동체적 장소와, 종가라는 중심과, 묘소와 재실이라는 극히 신성한 의례의 공간이 놓이게 된다. 녹우당에서 서향을 하고 있는 부분들은 사랑채 전부와 안채의 제례청 부분, 그리고 뒷편의 산신단과 사당들이다. 남향을 하고 있는 부분이 더욱 기능적이고 일상적인 공간들이라면, 중심축선상의 공간들과 서향한 건물들은 상징적이고 규범적인 것들이다. 특히 안마당의 정면을 형성하는 안채 제례청은 그 놓인 위치나 규모로 보아 안대청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사 때만 사용하는 의례적인 장소다. 평시에는 항상 닫혀 있고, 북서쪽 모퉁이 놓인 두칸의 '못마루'가 안대청의 역할을 한다. 상징성과 일상성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서로 분리된 채 직교하도록 구성된 것이다.

비록 동서로 놓인 상징적인 축이 집의 구성축을 이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의 실용적 행위를 담기 위한 공간들은 모두 남북으로 놓였다. 우선 주요한 출입구들-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모두 남향하고 있다. 또한 행랑마당으로 들어오는 협문도 남향이다. 출입구를 남쪽으로 냄으로써 양지바른 곳에서 출입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담장을 휘어 골묵을 만들고 깊은 곳에 대문을 위치시키는 수법으로 은밀함도 얻고 있다. 주요 출입구를 남쪽에 냈다는 사실은 주요한 마당들의 방향성을 남북으로 생각했다는 점과 일치한다. 특히 동서로 긴 안마당의 비례는 남쪽의 햇빛을 더 받기 위해 남쪽 면을 늘인 결과일 수 있다.

안채의 주요한 방들-안방과 안대청(못마루), 며느리방과 시할머니방 모두가 남향하고 있다. ㄷ자 안채는 동서 상징축을 따라 놓여졌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방들은 남북으로 놓였다. 오직 제사용의 제례청만이 서향으로 놓여 종가집 안마당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ㄷ자 안채의 두날개는 중심의 제례청보다 그 폭이 두껍다. 날개채의 앞뒤로 퇴간을 만든데다가, 뒤편에 다시 쪽마루를 가설했기 때문이다. 몸채보다 날개채가 더 두꺼워진 것은 남향한 날개채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 효종이 하사한 사랑채 '녹우당'

먼저 은행나무 뒤로 높다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녹우당이 나온다. 이곳의 가장 상징적인 고건축물이다. 현재 이곳의 고택을 보통 녹우당이라 한다. 녹우당 하면 고택 전체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랑채인 녹우당은 고산선생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선생이 82세되던 1668(현종9)년에 그 일부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현재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고산선생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녹우당’이라는 현판을 써줌으로 인해 이 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됐다. 이곳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문예부흥이 이곳 녹우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 건물의 배치와 구조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서향을 하고 있다. 먼저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 나온다. 이곳에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침방, 사랑방, 대청이 ‘ㅡ’ 자로 늘어선 형태로 전면처마에 햇빛을 차단하는 차양이 달려있다. 사랑채 전면에는 방형의 연못이 파여져 있고 각종 수목이 잘 가꾸어져 있어 조선시대 사랑채의 남성공간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를 이룬 ‘ㅁ'자형의 구조를 이룬다.안채 좌측 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진 곳에 장독대와 곳간들이 있어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안채 뒷편에는 과실수가 심어져 있는 넓은 후원(後園)이 형성되어 있다. 사랑채가 남성들의 공간이라면 안채는 안주인과 여성들의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 녹우당도 안채의 각 방의 용도에 따라 기거하는 신분이 달랐는데 안방은 안주인이 차지하고 나이가 들어 며느리에게 실권을 넘기면 건너방으로 가서 기거했다고 한다. 또한 집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못방'이라는 방은 며느리가 거처하였다. 현재는 옛날의 생활방식과는 달라져 집의 주인인 종손내외가 안채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랑채는 상량문에 철종 9년(1858)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 전면 해체된 후 복원을 통해 건물을 다시 지어졌다. 해체되기 전 사랑본채는 4간집으로 좌·우측에 각각 2간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건물의 전면에 사랑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차양을 설치하고 있는데 이는 어초은 추원당을 비롯하여 고산 제각 등 해남윤씨가 관련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아랫방 웃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성들의 공간답게 아랫방은 밤에 가장의 침실역할을 하였고 웃방은 외부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잠자리로 사용되었다.
 

 또한 골방은 옷을 갈아입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약을 집적 조제, 처방할 수 있는 약을 보관해둔 약장이 있는 등 다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작은 사랑방이 있어 이곳에 장남이 기거하였고, 옆방에는 책이나 중요한 문서를 보관해 두었다고 하며 윤씨가의 고문서나 화첩 시문 등이 이곳에 잘 보관되어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해남윤씨 종부들의 지극한 공이 숨겨있다.

 

 - 유교생활의 중심 사당

 조선시대 유교생활의 가장 큰 덕목중에 하나가 조상숭배로 그 흔적을 잘 엿볼 수 있는 곳이 사당이다.  이곳 녹우당의 사당은 고산 사당이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사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천지위는 보통 국가의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입향조인 어초은공과 불천지위인 윤고산의 사당을 따로 지었다. 그리고 집안 동쪽에 사대조를

받드는 안사당이 있다.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사당은 순조 21년(1821)에 세웠으며, 그 1년 뒤인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이와 함께 행랑채는 보통 주인의 집안 일을 도우며 사는 하인들이 살던 곳으로, 녹우당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ㄱ'자형의 문간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방과 곡간, 마굿간, 부엌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글 : 정윤섭, 김봉렬, 윤춘식)
 

 

 - 백련지와 맘(마음)무덤

연동마을 입구의 백련지(白蓮池)는 어초은공께서 양음(陽陰)과 풍수(風水)에 맞추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 사이에 안산(案山)겸 백련지(白蓮池)와 동산을 만들어 조성한 원림이다. 전통 풍수적인 의미에서는 장풍득수(藏風得水)로 그 뜻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이치로 만들어 졌다고도 볼 수가 있다. 현재 주차장 아래에 있는 연못은 평범한 형태의 연못이었으나, 이후 백련지는 풍수지리에

 

도 신안을 가졌던 고산선생에 의하여탁월한 원림조성솜씨로 이곳 연못 가운데에 큰섬과 작은 섬을 만들고 작은 섬에는 소나무를 심고 큰섬에는 정자를 지어 멋스런 연못으로 만들어졌다.백련지(白蓮池)의 특징은 방형(方形) 연못, 구체적으로는 변형된 방지(方池)인데,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

형태이다. 연못의 형태가 직선으로 구성된 것은 음양설로도 설명될 수 있다. 네모난 형태의 연못 윤곽은 땅, 즉 음(陰)을 상징하고, 연못 중앙의 둥근 섬은 하늘, 즉 양(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지 속 네모진 섬에 정자가 있었다. 방문 앞과 옆 좌와 우에는 마루가 깔린 대청이 있는 정자였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없다. 마을에는 “蓮池에 물이 가득 차 그 물 속에 덕음산의 산 그림자가 비추어야만 집안이 펴고 마을이 번성한다”라는 선조들의 말씀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몰(말)무덤'이라고도 부르는 이 맘무덤은 어초은공께서 연지(蓮池)를 조성하면서 백련(白蓮)를 심고 퍼낸 흙으로 마음 심(心)자의 형태로 만든 동산이었다. 공께서는 '學問'과 '行道'를 선비의 긍정적인 면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현실적인 마음의 상념체(想念體:喜怒哀樂愛惡慾)를 순리의 삶으로 바꾸어, 후손들이 흰 연꽃이 물에서 나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 위에 나와 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이, 세간에서 나서 세간에 살지만 세간을 벗어나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범인(凡人)으로서의 욕심이 없는 각위(覺爲)와 지행(知行)이 합일(合一)된 지혜로운 유교적(儒敎的) 군자(君子)로서의 삶을 살기를 꿈꾸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자가 있던 섬과 여름철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달고 시원한 물이 힘차게 솟아 연지에 맑은 생명의 힘을 대주던 우물(井泉) 그리고 우물아래 봄이면 푸른 미나리꽝과 그 사이에 놓였던 돌다리, 돌다리 우측 옆에서 봄이면 붉디붉은 꽃송이가 피어나 한없는 소박함으로 어린 가슴을 물들이던 동백섬, 그리고 샘터 주변의 오래된 버드나무 등 지금은 소실된 이 모든 흔적들이 복원될 때 비로서 연동의 참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오늘날 녹우당은 어초은공(漁樵隱公)의 정신과 철학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자손들에게 면면이 이어져 격변하는 시대의 부침 속에서도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으로 녹우당(綠雨堂)의 역사가 훼손(毁損)됨이 없이 600餘年의 긴 역사로 보존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글 : 백련 윤춘식, 연꽃사진 : 삼돌이)



 

 

 


녹우당 현판

녹우당(綠雨堂)의 당호(堂號)는 부귀와 영화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남을 지배하는 데서 얻는 쾌감보다는, 도의로서 인간의 경지를 승화하여 모두가 정당한 삶을 누리게 하며, 자신의 생명보다는 도덕적 명예를 중시하는 선비로서의 공재 윤두서의 도덕적 용기와 의지를 4월과 5월의 대지에 영양분을 흠뻑 적셔주는 푸른 비(綠雨)로 그 기상과 정신을 기려 옥동 이서(玉洞 李敍:1662-1723)께서 綠雨堂이란 현판을 표현한 것이다.
녹우당의 현판은 옥동 이서(玉洞 李敍)의 글씨이며, 그의 글씨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이다. 

 


운업 현판

운업(芸業)이란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하다”의미와 “업(業)은 일, 직업, 학문, 기예의 뜻”으로 “늘 곧고 푸르며 강인한 선비이자 충신 열사의 정의로운 적극적 행위 개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녹우당 당호를 설명하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사 현판

녹우당 안채에는 각 방향마다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일로향실(一爐香室) : 향기가 있는 방
죽로지실(竹爐之室) :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
노학암(老學岩) : 늙도록 배움이 있는 방


 

 

 

 

 

 


추원당

   산소 북쪽으로 추원당이 보인다. 어초은공의 재실인 추원당의 규모는 여러 칸으로 당당한 체격이다. 역시 서향이며 일곽은 낮은 담장을 반 듯한 윤곽에 싸서 정리되어 보이며 앞으로 대문채가 자리 잡았다. 여러 칸의 대문채 중간에 솟을대문이 섰다. 건물의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다. 좌우로 삼각상의 합각이 있고 박공판이 설치되었다.

 


 

 

 

 

 

 

어초은 사당

   안채 담장과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울린 멋진 풍광이 어우러져 있다. 사당은 신문과 담장과 사당채로 이루어졌는데 역시 채색하지 않은 질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연동의 입향조인 어초은공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어초은 윤효정의 묘

   사당 뒷산에는 중조(中祖)인 어초은 윤효정과 부인을 합장한 묘가 있다. 오석으로 다듬어 글자를 새겨 가첨석을 씌운 묘표석과 상석과 망주석 그리고 키가 작은 석인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 사당

   고산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고산사당은 나지막한 담장과 역시 서향한 지극히 소박한 신문(神門)이 설치되고 그안통에 3칸의 단청하지 않은 건물로 조성되었다. 신문은 솟을 삼문형식이긴 하나 좌우에 문짝을 다 만들지는 않았다.
영조 3년(1727)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별도로 사당을 지었다.


 

 

 

 

 

 

가묘(안사당)

   4대 조상들의 신위를 모신 가묘이다. 안채 남쪽으로 열린 편문을 열고 나서면 뒤울타리가 된다. 뒤울타리의 동남편 담장안에 3칸 규모의 건물이 외딴 자리에 담장을 따로 두르고 독존해 있다.
앞퇴에 마루를 깔고 중앙칸에는 띠살무늬 사분합을 달고 좌우협칸에는 외짝만을 설치하였다. 홑처마에 채색은 없고 지붕은 맞배이다.
순조 21년(1821)에 세웠다.
 

 

 

 

 


비자나무숲

종   목 : 천연기념물   241호
명   칭 : 해남연동리의비자나무숲
           (海南蓮洞里의비자나무숲)
분   류 : 학술림
수   량 : 29,700㎡
지정일 : 1972.07.31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산27-1
소유자 : 윤형식
관리자 : 해남군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넓게 피고 열매는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맺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해남 연동리의 비자나무숲은 우리 조상들이 조성한 인공숲으로 문화적·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해남(海南) 윤씨(尹氏) 어초은(漁樵隱) 선생(先生)의 사당이 있는 뒷산에 있다. 현소유자(現所有者)의 17대조(代祖)께서 심었다고 하므로 수령(樹齡)은 530年정도 되었을 것이고 높이 20m, 지름이 1m, 수관폭(樹冠幅) 15m정도인 것이 가장 큰 것에 속한다. 사당 앞에는 4그루의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초은(漁樵隱) 선생의 아드님 4형제(兄弟)가 각각 한 그루씩 심은 것이 자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을 가꾸고 있어 연동리(蓮洞里)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뒷산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윤씨(尹氏)의 선조(先祖)께서는 다음과 같은 유훈(遺訓)을 남겼다. "뒷산의 바위가 노출(露出)되면 이 마을이 가난하여진다." 후손(後孫)들은 뒷산의 나무가 무럭 무럭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여 온 결과 오늘과 같은 임상(林相)으로 되었다고 한다.
비자나무 숲으로 올라가기 전의 산록(山麓)에는 곰솔나무숲 속에서 소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다. 밑에는 사스레피나무, 참식나무, 마삭덩굴, 개비자나무, 남오이자, 송악, 모새나무, 보리밥나무, 자금우, 및 동백나무 등의 상록수종과 더불어 맥문동, 실맥문동 및 춘란이 여기 저기서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 숲의 위가장자리에는 참식나무 등의 큰 나무가 보이고 곰솔 중에서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5m, 지름 2m정도 이다.
비자나무숲 좌우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종은 굴참나무, 상수리, 갈참, 졸참,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말채나무, 노린재나무, 작살나무, 말오줌때, 노간주나무, 청미래덩굴, 댕댕이덩굴, 조록싸리, 길마가지나무, 진달래, 감태나무, 및 철쭉 등이며 그 밑에서 구절초, 새 개솔새, 개억개, 신감채, 며느리밥풀, 반디지치, 싱아, 네잎갈퀴, 활량나물 등이 자라고 있다.(문화재청)
 

 


은행나무
 
보호수

지정품목 및 번호 : 도나무 10-96
지정년월일 : 82. 12. 3
구 분 : 정자목
수목및본수 : 은행나무 1본
과 명 : 은행나무과
학 명 : ginkgo biloba linnaeus
소재지 및 위치 :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고산유물관앞 90
수 령 : 500년
수 고 : 20m
흉고나무 둘레 : 4.8m

수관직경 : 19m
소유자 : 해남읍 연동리 윤영선
관리자 : 해남군 성내리4 해남군수  
지정사유 : 보호수, 규격에 미달되지 않고 희귀목이며, 고산윤선도 유물관앞에 생립되어 지정
나무의특징 : 수목이 오래되어 웅장하며 은행나무로서의 가치가 돋보임.
연혁 및 전설 : 1543년경에 고산 윤선도가 거주 하면서 식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적지에 대표적인 나무로서 고산선생의 전통을 한눈에 볼수있음. (해남군청)
 


해송

보호수

지정품목 및 번호: 마을나무 10-18-1-35-10
지정년월일: 82. 12. 3
구 분: 정자목
수목및본수: 해송1본
과 명: 소나무과
학 명: pinus thunbergii parlatore
소재지 및 위치: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수 령: 300년
수 고: 24m
흉고나무 둘레: 3.4m

수관직경: 18m
소유자 : 해남읍 연동리 윤영선
관리자 : 해남군 성내리4 해남군수
지정사유: 유적지 주위에 생립하여 풍치목으로서 보호할 가치가 있으므로 지정
나무의특징: 해송으로서 가치가 매우 좋으며 유적지에 위치하고 생육상태가 양호함.
연혁 및 전설: 유적지 뒤에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숲과 같이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적인 사당의 가는길목에 자리잡고 있음. (해남군청)
 

찾아가는길
 

 

 

 


☏ 고산유적관리사무소 : 061-533-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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