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윤선도 보길도유적지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km정도 떨어진 섬이다. 그 생김새가 쟁기에 끼우는 보습 형상이어서 보습의 어원인 '보고래 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 곳에
산이 빙 둘러싸여 있어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여 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아 부용동(芙蓉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곳. 파도를 따라 한수 한수 떠밀려와 어부사시사로 머문 곳, 고산 윤선도 선생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곳.
   고산선생은 아름다운 부용동의 순수자연경관을 기반으로 하면서, 주변 경물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최소한의 인위적 조성(건물과 정원요소)을 추가하여 원림을 조영하였다. 이것이 기존의 정원과 다른 점이다. 고산선생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의미를 부여하였던 그 자연경관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서 고산선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산선생의 보길도유적은 바로 그 부용동원림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상세정보


종   목  사적   368호
명   칭  보길도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
분   류  원지
면   적  83,532㎡
지정일  1992.01.11
소재지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595외
소유자  완도군외3명
연혁
   - 세연정 복원공사(16.4평)
     동천석실 복원공사(1.04평) [1992.07.16~12.16]

 

   - 세연지 지역 정비, 계담 지역 정비  [1993.10.12~12.20]
   - 자연석 석축쌓기, 바닥준설공사 [1994.04.28~07.26]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선생(1587-1671)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이 고향인 해남(海南)에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렀으나, 인조(仁祖)는 이미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탐라(耽羅: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甫吉島)의 산세가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보길도는 선생이 인조(仁祖) 15년(1637) 51세 때 이곳에 들어와 여러 차례 출입을 하면서 별서(別墅)를 짓고 13년간 글과 정서를 닦으며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産室)이기도 하다. 격자봉(格紫峰) 밑에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小隱屛), 낭음계(朗吟溪),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造景)을 경영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曲水堂)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칸 집을 짓고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여 독서하며 선경(仙境)에 노닐었다.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계간(溪澗)을 판석보(板石洑)로 막아 계담(溪潭)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方池)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단(壇)을 쌓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이곳이야말로 조선시대(朝鮮時代) 별서조원(別墅造園)의 아름다운 조영(造營)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문화재청) 
 


사적지 연혁

1978년 9월 22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 '윤선도의 부용동정원(尹善道의 芙蓉洞庭園)'으로 지정.
      년 2월  5일 사적 제2호 '보길도 고산 윤선도 유적'으로 지정변경.
1989년 유적 발굴조사 실시.
1992년 1월11일 사적 제368호 '보길도윤선도유적'으로 지정고시.
1993년 12월 30일 세연지 및 계담 지역 정비
 


보길도와의 인연

   보길도에 고산 윤선도선생이 정착한 해는 1637(인조 15)년 선생의 나이 51세때였다. 혼탁한 정치현실에 회의를 느껴 향리인 해남에 낙향하여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국충정에 불타던 선생은 임금을 돕기 위해 향리자제들과 의병, 가복(家僕) 등 근왕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배편으로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수일이 안되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호남으로 급히 돌아가면 영남으로 갔다는 어가를 만날수 있을 것이고 조정의 명령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렇지 못하면 백이(伯夷)처럼 서산(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서산지미(西山之薇)>,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기자지금(箕子之琴)>,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관녕지탑(管寧之榻)>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급히 영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하지맹(城下之盟,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서 항복한 일)의 치욕이 있었다. 선생은 충분(忠憤)에 복받치어 다시는 육지에 오르지 않으려고 배를 띄워 남쪽을 향해 내려가서 탐라(耽羅:제주도)로 들어가려 하였다. 가는 길에 심한 풍랑으로 배를 보길도에 대고, 그 수려한 봉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랐다.

그 영숙(靈淑)한 산기(山氣)와 기절한 수석을 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하고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았다.
 


부용팔경(芙蓉八景)

   고산 선생은 부용동 곳곳에 팔경(八景)을 선정하고 낙서재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짓는 틈틈이 부용동 산야를 소요했다. 부용팔경은 격자봉 기슭에서부터 청별 앞바다까지 내려오면서 산재해 있다.
 

   제1경  곡수당의 연꽃
             (蓮塘曲水:연당곡수)
   제2경  은병 석벽에 부는 맑은 바람
             (銀屛淸風:은병청풍)
   제3경  세연정의 홀로선 소나무
             (然亭孤亭:연정고송)
   제4경  곡수당터의 늙은 동백
             (水塘老柏:수당노백)
   제5경  석실에 감도는 저녁 연기
             (石室暮煙:석실모연)
   제6경  격자봉을 두른 해운  
             (紫峰歸雲:자봉귀운)
   제7경  솔재에 둥우리를 튼 갈가마귀 떼
             (松峴捿鴉:송현서아)
   제8경  미산에 뛰노는 푸른 사슴
             (薇山遊鹿:미산유록)

 

 


유적지

   고산선생은
일찌기 섬 속의 모든 경치를 평하기를 석실(石室)은 신선(神仙)에 비교한다면 당연히 그 중에 제일이 되고, 세연정(洗然亭)은 번화하면서도 청정한 낭묘를 겸비한 기구이며, 곡수(曲水)는 정결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자라고 하였다.

   유적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이 '가장유사(家藏遺事)'와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유적지에는 건물터와 대(臺)가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다.
                      고산 선생은 바위 등 아름다운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과 의미를 붙였음.
                      건물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살지 않아 자연 소멸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산선생 사후 78년에 후손
                      인 윤위가 부용동을 방문했을 때에는 학관의 사위(이동숙) 혼자서 부용동을 지키고 있었으나 오
                      고가시던 오솔길도 없어지고 초목만이 우겨져 있을 뿐 아니라, 남아있는 대사도 무민당과 서와,
                      곡수당, 세연정뿐이고 낙서재와 동와, 정성암 등은 다만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사이사
                      이에서 남긴 터전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그 이후엔 학관의 사위 마져 육지로 나
                      가 버려 부용동엔 아무도 살지 않아 나머지 건물들도 모두 소멸되어 터만 남았다.  
                      
       건물터 : 세연정(洗然亭),낙서재(樂書齋),무민당(無悶堂),동와(東窩),서와(西窩),곡수당(曲水堂),
                   동천석실(洞天石室),정성암(靜成庵),서재(書齋),연정(蓮亭)
       대(바위) : 승룡대(升龍臺),하한대(夏寒臺),혁희대(赫羲臺),동대(東臺),서대(西臺),옥소대(玉簫臺),
                  오운대(五雲臺),독등대(獨登臺),상춘대(賞春臺),언선대(偃仙臺),곡수대(曲水臺), 석전대
                  (石田臺), 곡산대(曲山臺), 유선대(遊仙臺),
       바  위 : 소은병(小隱屛),귀암(龜岩),옥소암(玉簫岩),혹약암(或躍岩),사투암(射鬪岩), 유도암(遊跳岩),
       다  리 : 비홍교(飛虹橋),희황교(羲皇橋),일삼교(日三橋),유의교(有意橋),상루교(上樓橋)
       기  타 : 미전(薇田),석애(石涯), 낭음계(朗吟溪),격자봉(格紫峰),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목욕반(沐浴盤),
                  조산(造山),석문(石門), 석제(石梯), 석난(石欄), 석정(石井), 석천(石泉), 석교(石橋), 석담(石潭),
 

 - 황원포 (潢源浦)

   고산(孤山) 선생이 제주도로 항하던중 심한 풍랑(風浪)을 만나 처음으로 보길도에 배를 정박(碇泊) 했던 곳으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맞지 않는 팔풍지대(八風之席)이다. 

 

 - 부용동원림 지역

부용동 일대는 파란 많은 정치사의 굴곡 속에서 고산 선생이 자신의 이상향으로 꾸민 천혜자연의 별세계였다.
우리 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신선사상을 배경으로한 별서조원이나 원림문화가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적인 양식으로 정착하였는데 남원의 광한루원과 무등산 기슭에 자리잡은 양산보의 소쇄원, 그리고 고산 윤선도 선생이 은거한 보길도 부용동원림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용동원림은 자연을 개조하여 꾸몄지만 전혀 인공의 치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 속에 하나가 된 조선원림의 백미로 꼽힌다.
특히 세연정 지역은 고산선생이 마음을 다스리던 장소로써, 시와 노래 그리고 춤이 어우러진 예술철학의 공간이었다. 유가(儒家)에서는 난세를 극복하고 치세를 이루고 싶은 오랜 소망에서 예악(禮樂)을 주장해 왔다. 고산선생은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예악사상(禮樂思想)을 몸소 실천하며 사회적 현실에 회의를 느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이곳 세연정에 유독 무대(舞臺)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악사상을 반영시켰기 때문이다.
고산선생은 '예악은 항상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된다'는 『예기』「 악기」의 예악사상을 실천하면서  "
말속(末俗)에서는 음악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고, 단지 기쁨을 돕는 것인 줄만을 알고 있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번거로운 소리만을 즐겨듣고, 평화롭고 장엄하며 너그럽고 치밀하며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른 뜻(和莊寬密中正之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루(鄙陋)한 사람들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병통인 것입니다."라고 우려를 나타내었다.
또한 공사(供辭)에서는 "제 평생의 성벽이 본디부터 산수에 있었으며, 들어갔던 섬에는 천석이 절승하여 귀신이 깍아 세운 듯 하니 인간세상의 이목으로는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심히 사랑하여 흥을 의탁하고 시름을 잊어 종로(終老)의 계교로 삼으려 했습니다...강과 산에서 날라리와 북으로 멍울진 마음을 달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참지만 창자는 찟어질 듯 아픔니다.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찾아 물가에 쉬면서 물에 씻겨 반들거리는 돌을 하염없이 바라 보고 소나무를 어루 만지며 대나무에 기대어 서는 것은 가슴 속에 뭉쳐있는 답답한 마음을 씻어 버리려는 까닭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세연정(洗然亭)

   세연(洗然)이란 기분이 매우 상쾌하고 단아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세연정은 회수담과 세연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정방형 정자로 난방시설까지 갖추었으며, 사방으로 문을 열어 젖힐 수 있는 개방된 구조였다. 세연정의 편액을 칠암헌(七岩軒)이라 하고 사방에 각기 다른 편액을 걸었는데 중앙엔 세연정(洗然亭),남쪽엔 낙기란(樂飢欄),서편엔 동하각(同何閣),동편엔 호광루(呼光樓)라 하였다. 세연정은 낙서재 터, 곡수당, 석실과 함께 보길도에 남아 있는 네 개의 고산선생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된 대표적인 것이다   


세연지(洗然池)
 

   우리나라의 정원유적중에서 조형처리가 가장 화려하고 광대한 연못으로 계곡의 물을 잘 이용한 연지(蓮池)이다. 세연지는 농토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담(潭)을 이루고 있는데 연지 북쪽의 인공적인 직선형과 남(南)쪽의 자연적인 곡선형으로 나눌수 있으며 연지(蓮池) 내부에는 암석과 축판등을 볼 수 있다. 세연지는 항상 맑은 물이 찰랑거리게 하였고 작은 배를 띄워 어린 아이들이 뱃놀이하면서 어부사시사를 읊조리는 것을 감상하던 곳이다.   


회수담(回水潭)
 

   세연정 정원의 일부로서 인공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네모꼴의 연못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인공축도(人工築島:방도)가 있고 유도암(遊跳岩)이 있다.
   5입3출(五入三出)의 수량조절물막이라는 독특한 흡수구,배출구가 있어서 항상 세연지의 수량을 알맞게 조절하는 기능을 하였다.
   부용팔경 중의 연정고송(然亭孤亭)이 이곳 소나무이다. 


동대(東臺)
 

   세연정의 좌측에 위치해 있는 축단으로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이라는 예악사상(禮樂思想)에 의하여 군무(群舞)를 하던 곳이기도 하던 이곳은 연지에 담겨있는 조원(造苑) 철학 즉, 동대와 서대로 만들어지는 2개의 섬은 하늘의 우주와 땅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성리학에서 理論와 氣論)인 성리학의 기본인 愼獨의  心의 心論이 담겨 있다.
 


서대(西臺)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群舞)행위를 했던 곳으로 나선형의 3단이 남아 있다. 이곳 역시 동대와 마찬가지로 연지에 담겨있는 조원(造苑) 철학 즉, 동대와 서대로 만들어지는 2개의 섬은 하늘의 우주와 땅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성리학에서 理論와 氣論)인 성리학의 기본인 愼獨의  心의 心論이 담겨 있다.
 




유도암(遊跳岩)

   회수담의 중앙에 신선의 세계를 상징하는 작은 섬과 유도암으로 불리우던 네모난 바위가 배치되어 있다.



 



사투암(射鬪岩)
 

   세연지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활을 쏘았던 곳으로 활을 쏠 때 용이하도록 발걸이를 만들어 놓았다. 고산선생이나 근왕병들이 맞은편 산중턱의 옥소대의 표적을 향하여 활쏘기 훈련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혹약암(或躍岩)
 

   세연지에 있는 칠암 중 하나로, 『역경(易經)』의 건(乾)에 나오는 '혹약재연(或躍在淵)'이란 글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뛸 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연못에 있다."라는 뜻으로 혹약암이 마치 뛰어나가는 힘찬 황소의 모습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산선생은 이 바위위에 올라 (洗然池)를 두루 바라보며 시가를 읊었다 한다.
 


판석보(板石洑, 물막이석축)
 

   우리나라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 세연지의 가장 기발한 특색은 계간에 판석을 축조하여 보를 막아 계담을 이루게 하고 그 물을 돌려 인공 연못으로 넣었다가 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착상은 농민들이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대는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계간을 막은 판석보의 길이는 약11m, 폭 2.5m, 높이1m쯤 되며, 활처럼 굽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축조된 판석 중 큰 곳은 길이 2.4m, 폭1.5m, 이고 작은 것은 길이 1.2m. 폭1.3m정도이다. 전체 두께는 약 30cm정도이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벽처럼 판석을 견고하게  한 다음, 판석으로 위에 뚜껑 돌을 덮었다. 판석의 이음새는 ]형과 [형으로 판석 연결부분을 쪼아내어 결합시키고 구멍을 판 후 판석과 같은 재질의 돌 족을 박아 고정시켰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계원 공간 속의 돌다리가 되어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고, 폭우가 와서 개울의 물이 넘칠 때는 폭포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조원유적 속에 이와 같이 기발한 석조 보는 세연지에 있는 보가 유일하다.(정재훈)
허나 지금은 활처럼 굽은 곡선은 거의 일직선으로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의 설계에 따라 완도군에서 보수공사를 주관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비홍교(飛虹橋)

   정자 서쪽에 약간의 물이 고여 있는 곳에 거북 같은 암석(귀암:
龜岩))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비홍교(飛虹橋)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비홍교는 세연정에 이르게 하는 다리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잡석을 쌓아 세연정의 방단(方壇)과 연결해 놓았다.

 

 

 - 동천석실 지역


동천석실(洞天石室)

   낙서재로부터 정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km지점 해발 100~120m에 위치하고 있다. 동천석실로 접근하는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천(石泉), 석폭(石瀑), 석대(石臺) 및 희황교(복희씨) 등의 유적이 있다. 동천석실은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로 서책(書冊)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隱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천(洞天)이란
신선들의 거주처인 동천복지(洞天福地)에서 연유된 것. 
 

낙서재터를 잡던 처음에 안산(案山)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가 한참 뒤에 가마를 타고 곧바로 석실로 향해가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기교하고 굉한한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난(石欄), 석정(石井), 석천(石泉), 석교(石橋), 석담(石潭)은 모두가 인공의 손이 닿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그 모양에 따라 명명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한간 집을 석함(石函)속에 짓고 명명하기를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이곳을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골짜기와 격자봉 낙서재의 건물이 환하게 펼쳐지는 것을 구경하였고, 무릇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에서 기를 달아 서로 호응하기도 하였다.



용두암(龍頭岩)
 

   용두암(龍頭岩: 용두는 도르레의 방언)은 동천석실 앞에 있는 두 개의 바위로, 두 바위 사이의 홈에 도르레 같은 시설을 설치하여 통속에 넣은 음식을 줄에 매달아 산 밑에서 부터 손쉽게 날라다 먹었다고 한다. 인력의 수고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고산선생의 지혜와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차바위
 

   동천석실 앞에 움푹 패인 바위는 고산선생이 차를 끓이던 장소라고 전한다. 그래서 이곳을 차바위라고 하는데 차상 다리를 고정할 수 있도록 몇 개의 홈을 파 놓았다. 선생은 이 곳에서 다도(茶道)를 즐겼다고 한다.
 

 

 

 

석담(石潭)

   석담(石潭)은 부정형 연지(蓮池)로 암석을 파서 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석천과 석담 사이의 바위에 구멍을 뚫어 물이 통하게 하였다. 현재 발굴중이다.




 



희황교(羲皇橋)

   석담 위쪽에 8단의 계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석천과 석담 사이의 구멍이 뚫린 바위가 그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된다. 이곳을 희황교(羲皇橋)라고 하는데 희황은 중국의 황제 복희씨를 말하는 것으로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천자가 사는 곳으로 비유한 듯하다.

 

 

 - 낙서재 지역                                                                          

   
낙서재(樂書齋)는 윤선도선생이 보길도에 정착하기 위해 제일 먼저 지은 살림집이다. 현재는 집자리와 무너진 돌담만이 남아 있는데, 발굴 조사 결과 사방으로 퇴를 단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본채인 낙서재와 별도로 옆에 사랑채를 두고 두 건물 사이에 2개의 부속채를 지어 튼 ㅁ자형의 주거를 만들었다. 낙서재 뒤에는 소은병(小隱屛)이라고 이름 붙인 바위가 있다.지금은 낙서재, 무민당, 동와, 서와의 흔적만 남아 있고 귀암(龜岩)의 자리에 민묘 2기만 자리잡고 있다. 
                                                                   

 


낙서재터(樂書齋)
 

   혈맥이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내려오면서 소은병(小隱屛)이 있고 소은병 아래가 낙서재 터가 되었는데, 그 혈전(穴田)은 꽤높고 크다. 왼쪽은 양(陽), 오른쪽은 음(陰)에 속한다. 입술은 다소 끝이 뾰족하고, 오른쪽에는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르고 있다. 처음에는 초가를 짓고 살다가 그 뒤에는 접목을 메어 거실을 만들었으나 견고하기는 하였으나 새김질은 하지 않았다.
   낙서재는 3칸에 사방으로 퇴(툇마루)를 달았으며, 칸살이는 매우 컸다. 방실(房室)에는 조정(藻井)을 갖추었다. 이 조정의 속명은 반자 이다.  

   이 곳에앉아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절승한 모든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날에는 뜰  앞 섬돌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 학관(學官)이 옮겨다 파서 지금은 난간 아래 위치하게 되엇다. 연못 좌우에는 화단을 쌓아 온갖 화초를 줄지어 심고 그  사이사이를 기암괴석으로 꾸며 놓았으며, 뜰 아래에는 화가(花架)가 있었다.
   옛날의 낙서재는 소은병 아래 있었다 지금은 함몰되거나 없어진 자리에  흐릿하게 터전만 남아 있어 옛모습을 다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돌로 쌓은 석축이 있고 그 중심부에 돌층계 흔적이 남아 있고 반듯한 터전과 기단과 주초석 일부가 보여 어느 정도 윤곽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춧돌 한편에 기와편이 상당히 모아져 있다.
 

무민당터(無悶堂)

   
무민당(無悶堂)은 낙서재의 남쪽에 지은 1칸의 사랑채로 '세상을 피해 산다.'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무민당 옆에는 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안식할 곳으로 삼았다. 현재는 연못지와 건물만이 남아 있다.
   낙서재의 남쪽에 외침(外寢)을 짓고<한 간으로 사방에는 퇴를 달았으며, 간살이 매우 컸다.> 두 침소 사이에 동와(東窩)와 서와(西窩)를 지었다. (각기 한 간식인 데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그리곤 늘 외침에 거처하면서 세상을 피해 산다(遯世)는 뜻으로 ‘무민(無悶)’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공은 늘 무민당에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경옥주(瓊玉酒)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자제들에게 각기 배운 글을 읽고 토론케 했다. 
 

 
소은병(小隱屛)

   소은병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4,5인이 앉을 만한 넓이의 바위다. 주자(朱子)가 은거한 무이산(武夷山)의 대은병(大隱屛)과 견주어 고산선생이 붙인 이름으로 주자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따르고자하나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하는 뜻으로 소은병이라함.
   여기에 앉아 있으면 한 골짜기의 크고 작은 것부터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고리처럼 두른 병풍과 우거진 장송, 풍백들은 공이 가장 아꼈던 것들이다. 비록 차가운 엄동설한이라도 옷깃을 헤치고 북쪽을 향해 앉아 있노라면 가슴이 활짝 열리는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부용동 8경중 은병청풍(隱屛淸風)이 이곳이다.
 


곡수당터(曲水堂)

   선생이 건물 짓는 것을 싫어하여 학관이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지은 곳으로 남쪽 난간은 취적(取適), 서쪽 난간은 익청(益淸)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정자는 세연정보다 다소 작지만 섬돌과 초석을 놓은 데는 정교함을 다했다. 초당 뒤에는 평대(平臺)를 만들고 삼면으로 담장을 둘러 좌우에 작은 문을 두고 있다. 그 중간에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고, 담장 서쪽 끝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삼층의 층계는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으므로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다. 담 밑에 흐르는 물은 낙서재 오른쪽

 

골짜기에 정자 십여 보 아래 조그만 연못으로 흘러내리는데 이곳에 일삼교(日三橋)가 가설되어 있다.  부용동 팔경중의 「연당곡수」가 이곳이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버려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곡수당 유적지는 개울가에 축조한 석축과 구 뒤편 언덕 아래로 쌓은 돌각담들이다. 개울가로 물을 담아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지표 아래로 조성되어 있다. 계곡 상류의 물이 수로를 따라 바로 흘러들게 되었는데 그렇더라도 연못으로는 너무 깊다. 현재 발굴중이다.
   

 



석전대(石田臺)

   격자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거대한 암석이 가로누어 있고, 이랑이 지어 있어 완연히 밭을 갈아놓은 듯 밭이랑 같이 생긴 암석을 말한다. 




 


혁희대(赫羲臺)

   
혁희대는 하한대보다 조금 높은데, 안으로는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밖으로는 황원포(黃原浦)를 대하고 있다. 이는 격자봉 다음가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정북을 향해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 고향과 임금을 바라본다(陞皇倪舊)”는 뜻을 취하여 명명하고, 궁궐을 연모하는 마음에서 붙인 것이다.

 



승룡대(升龍臺)

   승룡대(升龍臺)는 동천석실이 위치한 안산 동쪽 기슭에 있는 암석으로, "용이 하늘로 오르는 형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암석 위가 평평하여 수 십 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윤선도선생이 이 바위에 앉아 시를 읊곤 했다고 한다.



 



하한대(夏寒臺)

   하한대(夏寒臺)는 곡수당 북쪽의 작은 봉우리로,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여름에 피서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여름에 서늘한 곳이라는 뜻에서 하한대란 이름을 지어진 듯하다.



 

 



옥소대(玉簫臺)

   옥소대(玉簫臺)는
세연지 남쪽 산중턱에 있는 흰 바위이다. 그 그림자가 세연지(洗然池)에 드리워져 비친다. 옥소대에서 피리 등 관악을 연주했던 곳이다. 
시가무합일(詩歌舞合一)의 예악사상(禮樂思想)이 원림에 표현된 곳.


 


낭음계(朗吟溪)

   격자봉 서쪽 세 번째 골짜기. 심원(深遠)하게 돌고돌았는데, 송삼(松杉)이 울창하고 암벽(岩壁)이 깨끗하다. 낭음(朗吟)은 "옥을 굴리는 것처럼 낭랑하게 흐르는 물소리라는 뜻. 공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죽장(竹杖)을 끌고 소요하고 영가(詠歌)하면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길이가 3.5km에 달하는 보길도 내에서 가장 긴 하천이 격자봉과 동편의 406m 고지의 300m 높이로부터 발원하였다는 점과 개천의 물길은 곡수당과 방연지를 거쳐 흘러 내린다. 현재는 저수지 건설로 일부가 수몰됨   

 

미산(薇山)

  미산(薇山)은 고사리가 자란다는 중국의 수양산을 가르키는 뜻으로, 해발 113미터의 높이로 예전엔 이 곳에 사슴이 살았던 곳이다. 산록의 둘레에 석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슴방목을 하기 위한 우리로 보인다. 부용팔경 중의 하나인 미산유록(
薇山遊鹿)이 이 곳이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란 왕희지(王羲之)가 문인들과 모여 술잔을 물에 띄워 놓고 시를 지으며 놀았던 놀이로, 이 낭음계 골짜기에도 그러한 곳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저수지 건설로 수몰됨
 

 

 

목욕반(沐浴盤)

   목욕반(沐浴盤)이란 윤선도선생이 목욕하기에 적당한 암반을 골라 목욕반(沐浴盤)이라 이름을 짓고 종종 목욕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는 저수지 건설로 수몰됨
 

서재(書齋)

   곡수 남쪽 두 골짜기 안에 옛부터 서재가 있었는데 지금은 빈터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에 학유공 정유악과 진사 심단, 처사 이보만, 생원 안서익 그리고 학관 직미(5남) 등 수명과 더불어 같이 거처하면서 고산선생에게 과업을 강학받던 곳이다. 장남 인미가 공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연정(蓮亭)
 
   조산 안에 옛부터 연정이 있었는데 어느 때에 헐었는지는 모르나 지금은 그 지형이 낮아 논이 되었고, 희미하게 토대(土臺)가 있을 뿐이다.
 

조산(造山)

   석실아래로 보이는 조그마한 고분처럼보이는 산. 주산에서 떨어져 내려온 은은한 산맥은 들판을 건너면서 차츰 날등을 일으키고 있다. 높이는 두어 길에 지나지 않고 길이는 수십보이다. 사초가 매우 깨끗하고 위편에는 소나무, 노나무가 있어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연히 조그마한 병풍이 되어 안산의 기슭을 가리고 있어 인공으로 축조한 것 같다하여 조산이라고 하였다.
 

 

 

정성암(靜成庵)

   남은 터는 보이지 않는다. 낙서재
동쪽 언덕 밖으로 작은 암자를 지어 '정성'이라 하고 자제들과 문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던 곳이다.
 


보길도 연혁

   지금 보길도는 완도 군에 속해 있다. 완도는 삼국시대엔 백제 땅이었다 후에 신라가 점령하게 되는데 신라 흥덕왕 3년(828) 4월에 장보고(張保皐)장군이 지금의 완도읍 죽청리(竹靑里)와 장좌리(長佐里)청해진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해상 활동의 거점이 된다. 보길도는 노화읍 소속이었고 노화읍은 고려 현종 시절엔 영암군(靈巖郡)에 예속되어 있었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km, 노화도에서 남서편으로 3. 8km떨어진 자리, 동경 126도 37분, 북위 34도 06분에 위치해 있다.
   숙종 20년에는(1694)이래 영암군 소속이다가 고종 7년(1870)에 삼도진(三道鎭)이 설진(設津)되면서 보길도는 삼도진 소속이 되었다가 , 광무 원년(1897)에 완도군에 예속되는데 노화면, 보길면, 임도면으로 분할된다. 광복이후에 3개면은 노화면으로 1982년에 읍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길도 12경

고산 세연지    (孤山 洗然池:부황리)     / 월봉 망원설 (月峰望遠雪:선창리)
월송 광기암    (月松 廣寄巖:월송리)     / 우암 탄시암 (尤庵 嘆時巖:백도리)
큰기미 천장벽 (千丈壁:큰기미)            / 보옥 첨괴암 (甫玉 尖怪山:보옥리)
송기 흑명석    (松磯 黑鳴石:예송리)    / 설중산 동백 (雪中山 冬柏:부용리)
정자동고암     (亭子動鼓岩:정자리)     / 중리 백정사 (中里 白精砂:중리)
복생 풍란향    (卜生 風蘭香:예송리)    / 송도 일몰해 (松島 日沒海:정동리)
등을 들 수 있다
 

참조 :
   - 정재훈,보길도 부용동원림, 열화당, 1993
   - 신영훈,윤선도와 보길도,조선일보사,1999
   - 보길도 윤고산유적 조사보고서(조사단장 박태수),1981
   - '92년도 문화재 수리 보고서,문화재관리국,1992
   - 보길도 세연정지 및 동천석실 발굴조사개보,최맹식(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전남문화재 제4집

관련사이트
-보길도여행                 유적지소개
-동천다려                    유적지소개, 강제윤의 보길도 관련 시, 편지등
-전기철 남도답사          현대판김정호 전기철, 보길도지도
-한국정원톺아보기
   우리는 그가 보길도에서 얼마나 호화롭게 지냈는가 하는 따위에 기준을 두지말고, 그가 지니고
   있었던 꿈의 크기와 현실의 모습에서 그는 과연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와우트래블                 문화유산탐방기
-한국의 누정문화         정원소개
-보길도와 고산윤선도   유적지 소개
-동천석실로 오르는길
   
땅끝 마을의 도선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실컷 흙 냄새를 맡았다. 바닷바람이 술렁술렁
   이는 갯마을에서 맡는 싱싱한 흙내음이 우련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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