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정동 원림

    수정동 원림은 윤고산선생이 관부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영덕유배에서 돌아온 뒤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기로 결심하고 찾아낸 최초의 원림입니다.
    수정동 원림에는 현재 산속 깊은 곳에 윤고산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만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여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 문소동 원림

    문소동 원림은 수정동 원림에 이어 골짜기 깊은 곳에서 찾아낸 원림입니다.

    문소동 원림에는 현재 고산선생의 제실과 묘소가 있습니다.

    수정동 원림, 금쇄동 원림과 더불어 1동3승의 하나입니다.

  • 금쇄동 원림

    금쇄동 원림은 금제석괘를 얻는 꿈을 꾸고서 찾아낸 명승입니다.

    금쇄동 원림에는 고산선생이 신선세계로 찾아가면서 선정한 22비경이 있습니다.

    수정동 원림, 문소동 원림과 더불어 1동3승의 하나입니다.

     

     

       고산윤선도 금쇄동유적지

     

     


       "
    천년의 비경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서 나로 하여금 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하는가"
    고산선생이 금쇄동을 얻고서 이른 말이다.
     

       금쇄동은 고산선생이 54세되던 1640년에 '금제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몇일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다하여 금쇄동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은 수정동 · 금쇄동 · 문소동을 일동삼승(一洞三勝)으로 여기고 10년동안 은거하였는데, 고산선생은 이 곳에서 산거생활을 하면서 금쇄동기와 금쇄동집고 그리고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등의 작품을 지으셨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금쇄동의 위치가 해남군 현산면 상구시리 병풍산 무명봉 산성안인 것이 확인되고 지도에 표기됐다. 금쇄동은 해남 향토사연구회 조사를 거쳐 해남문화원에서 책자<孤山文學現場調査報告書(고산문학대축제 총서 제1집), 孤山文學現場圖錄(고산문학대축제 총서 제2집), 孤山文學과 海南(고산문학대축제 총서 제3집)>까지 발간되고, 사적지(사적 432호)로 지정되었다.


    <수정동·문소동·금쇄동 위치도>


     


    문화재 상세정보

    종   목  사적   432호
    명   칭  해남윤선도유적  (海南尹善道遺蹟)
    분   류  기타유적지
    지정일  2001.08.17
    소재지  전남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1 외
    시   대  조선시대 후기
    소유자  해남윤씨고산공파종중 외
    관리자  해남군
     

     

       금쇄동 유적지는 고산 윤선도선생이 54세때인 인조 18년(1640)에 머무르며 『금쇄동기』(보물 제482-2호)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을 집필한 곳인 금쇄동과 금쇄동 안에 위치한 현산고성이다.
       고산 선생은 8살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20세에 승보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1616년 성균관유생으로서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후에는 조상이 물려준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찾은 금쇄동에 여러 정자와 각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금쇄동은 고산 선생이 원림(園林)을 조성한 고성(固城)안과 『금쇄동기』에서 명명한 22개의 지명 등이 있으며, 선생이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척한 문학산책로로서 건물지와 연못지의 유구가 남아 있고, 금쇄동내에 위치한 현산고성(懸山固城)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성내시설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산 선생의 시문학 창작의 산실로서 국문학상의 학술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옛성이 잘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다.(문화재청)
     

     


     금쇄동(金鎖洞)의 위치와 원림터

       고산선생의 연보(年譜)에 이 금쇄동을 발견한 것은 쉰네살이던 인조18년(1640) 영덕에 유배를 다녀온 후였다. 처음에 연동이 있는 덕음산에서 멀지 않은 수정동(水晶洞)에 머물다가 문소동(門簫洞)을 얻고는 그리로 거점을 옮겼었다. 고향에 머물다가 꿈에 보았던 자리인 금쇄동을 발견하고는 수정동, 문소동과 더불어 금쇄동에 터를 잡고 은둔의 생활을 하였다.  

       금쇄동 입구는 해남군 현산면 상구시리에서 하구시리 저수지쪽으로 약 4km쯤 가면 금쇄동입구라는 초라한 푯말이 세워져 있다.  현산고성과 그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금쇄동은 문소천을 둘러싼 고산분지형으로 산성의 동북편은 고산 윤선도선생이 22개의 비경을 노래한 자연으로, 맞은편에 병풍산과 마주보고 있다.
       산성의 남쪽편은 소봉을 이루며 절벽으로 접근이 어렵고 멀리 남해의 가련봉, 향로봉, 도솔봉을 관망할 수 있다. 금쇄동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동북쪽으로 길게 놓여 있어서 약 4km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금쇄동은 고산 선생이 54세되던 1640년에 '금제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몇일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금쇄동 원림의 공간구성은 양몽와, 회심당, 불원요, 휘수정, 교의재 등의 건물과 인공으로 만들어진 연못에 물을 공급하는 석천(石泉), 그리고 물이 폭포를 만드는 석병 등 자연 및 인공구조물로 구성되었다.
       이와같은 고산 선생의 원림구성은 보길도의 원림이나 수정동 원림과 유사성을 보이는데 자연적인 바위나 석대, 연못의 조경 그리고 이에 알맞은 건물을 축조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참조: 해남문화>

       수정동의 지형과 지세는 병풍산을 좌측에 두고 계곡안으로 진행하다가 천(川)이 갈라져 오는 우측에 위치한다. 지형은 평탄한 편이나, 큰 바위가 단을 지어있고 인근 산세에 비해 협곡으로 산정상의 평지가 암반을 만나 협곡으로 변화한다. 수정동 유적은 정지된 연못으로서의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가두거나 흘려서 상하연지를 조성함으로서 보다 극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계곡에 연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상하연지의 석축과 그것을 조망하고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한 정자터의 석축, 또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물길을 유도하며 조성한 석담 및 동백, 난, 대나무 등을 조성하기 위한 소단석축 등을 들 수 있다. 수정동에 발견되는 유적은 비교적 원형을 추정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다.   
                                                                                                  <해남군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금쇄동은 해남현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산세는 면곡(面曲)하고 험령(險嶺)을 넘으면 그 위에 고성지(古城址)가 있다. 인조때 현사람 윤선도가 산의 높은 곳을 금쇄(金鎖)라고 이름지었다.-(동국여지지:유형원,1656년)
    *.금쇄-동(金鎖洞) 【골】→ 금쇗골
    *.금쇗-골〔금사동, 금쇄동〕【골】오시밋재 밑에 있는 골짜기
    *.영모-재(永慕齋) 【집】구시리에 있는 해남 윤씨의 재실
    *.윤고산-묘(尹孤山墓) 【묘】금쇗골에 있는,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윤선도의 무덤
    *.추모-당(追慕堂) 【집】금쇗골에 있는, 해남 윤씨의 재실
     


     금쇄동의 산중신곡
      금쇄동 22비경 ===>자세히보기

       고산선생은 금쇄동에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약 9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산중신곡(山中新曲)'19수, '속산중신곡(山中續新曲)'2수, 기타 5수와 '금쇄동기(金鎖洞記)',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를 지었다.
       '산중신곡'은 산중생활에서 촉발된 감흥을 읊은 시가이고 '금쇄동기'는 아름다운 금쇄동의  산수 경관을 술회한 한문 수필이다. 고산 선생의 나이 쉰 여섯 살에 유명한 '오우가'와 더불어 시조 '만흥', '조무요', '하우요'등이 창작된다. 이상향을 얻은 만족스러움에서 발로된 창작활동인 듯이 느껴진다. 이 작품들은 고산유고 권5하 부록에 실려있다.
       금쇄동기의 내용에 따르면, 고산 선생은 금쇄동의 중심을 회심당으로 삼았다. 그래서 선생은 이곳에 ‘회심’이라고 붙이게 된 이유를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여러 가지 근거를 열거 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기에  “천년의 비경(秘境)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서 나로 하여금 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하는가”라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고산 선생은 금쇄동을 신선이 사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겼던 것 같다.
    아래의 시는 고산선생께서 금쇄동을 얻고나서 지은 것이다.
                                                                                                                         
          하늘과 신(神)이 몹시 아껴 한 구역을 숨겼으니
          뉘라서 작은 선경이 진경도록(眞景圖錄)임을 알리.
          만길 신선의 굴 옥으로 깎아 세운 듯 하고,
          산해(山海)는 천 겹 수묵도를 펼쳐 놓은 듯 하네.
          조수들은 가파른 봉우리에서 자유로이 노닐고
          비 비람은 잡초 우거진 들에 어둡게 깔려있네.
          이곳에 오르니 전날밤 꿈 생생하구나
          하느님은 무슨 공으로 금쇄(金鎖)의 궤를 나에게 주셨나요.

    휘수정(揮手亭)터
       병풍 아래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시인 묵객들의 휴식처로 삼았던 곳. 단칸 정자로 사모초가지붕을 올린 것으로 추정.

    불원요(不원寮)터
       상하연지 중앙에 있던 정자로 석천에서 샘물이 솟아 연못을 파고 연꽃과 고기를 기르면서 편히 쉬거나 정신을 집중했던 곳. 전면 2칸반, 측면 1칸과 퇴칸의 작은 정자로 2칸누각으로 추정됨.

    회심당(會心堂)터
       월출암 북쪽에 지은 작은 당으로 편히 쉬며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할 곳을 삼아 항상 거쳐했던 곳. 온돌과 마루로 이루어진 전면3칸, 측면1칸과 퇴칸으로 이루어진 3칸집으로 추정.

    양몽와(養夢窩)터
       월출암에서 서남방향으로 약 60m거리에 위치. 전면 5칸, 측면 1칸,전퇴, 후퇴를 갖춘 비교적 큰 건물로 정주간(부엌), 온돌방, 고방 등을 갖춘 일자형의 형태로 추정.

    교의재(敎義齋)터
       고산선생이 후학들의 숙식을 할 수 있도록 지은 건물로 양몽와터에서 남쪽으로 약 30m거리에 위치. 전면 5칸, 측면 1칸에 전후 퇴칸을 가진 건물로 동서향에 각각 온돌방을 가진 건물로 추정. 서원의 강당과 같은 구조.

     


    수정동 원림


       수정동은 현산면 만안리 미세마을 건너편 만안저수지 윗쪽에 위치한 계곡이다. 수정동은 지난 87년 전남대 박준규 교수에 의해서 그 터가 밝혀졌다. 고산연보에 나오는 인소정터와 수정암, 그리고 두 곳으로 추정되는 연못터까지 모두 밝혀졌다. 기록에 따르면 고산 선생은 이곳에서 1년 밖에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고산 선생은 금쇄동에 거주하면서 이곳을 수시로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산 선생이 영덕의 귀양에서 풀려 은거지로 처음 찾은 곳은 수정동이요 이 곳에 인소정(人笑亭)와 정지(亭池)를 구축하고 원림을 이루었다. 수정동 원림을 이루면서 비폭(飛瀑)이 날리는 병풍 바위 아래에 정자를

    지었다. 이곳의 병풍 바위가 수정암(水晶岩)이다. 수정암에서 날려 떨어지는 폭포수는 아래의 너럭바위 위로 흘러 내린다.이 널따란 반석이 요석암(瑤席岩)이다. 인소정 아래에는 물이 흘러 고이게 하는 정지를 마련하였다. 이 연못 가운데에도 입석(立石:선 바위)을 두었다. 이 바위가 지중암(池中岩)이다.

    수정동 원림은 산속의 자연계류(自然溪流)를 이용하여 꾸민 계정(溪廷)의 형태를 보이는 원림이다. 이 원림의 공간구성은 고산선생이 요석(瑤席) 또는 수정암(水晶岩)이라 표현한 거대한 암반을 중심으로 상하의 원림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부의 원림공간은 상지(上池)에서 발원하는 유수를 이용하여 다양한 양태의 수경을 연출할 수 있도록 기교를 부린 계류를 중심하고 주변에 석축을 쌓아서 단을 이루거나 공간을 한정하고 있다. 이와같이 수경을 위주로 한 계정(溪廷)의 원림구성을 위하여 위쪽에 만들고 그 못에서 흘러내린 물이 소규모의 계류를 형성하며 일정량의 수량으로 폭포가 되어 떨어져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축석과 축요를 설치하고 있다. 그 결과 폭포와 웅덩이, 그리고 물길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또한 원림 내의 중요한 조망대상이 되고 있다. 수정동 원림의 계류를 수경의 구성적인 측면에서보면 상지(上池)의 넓은 수면은 유유자적하며 풍요로운 수경을 보여준다. 소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물의 약동적인 풍경을 보여주며 암반을 타고 흘러 웅덩이에 고인 물은 잔잔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곡류하는 유수는 여유있고 온화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등 수경의 다양한 모습을 즐길 수 있는 계류를 구성하고 있다. 수정동 원림은 조용하고 깊숙한 산속의 은거지에 속세와 떨어져 자연과 함께하고자 했던 고산의 은둔사상이 엿보이는 원림으로써, 이곳의 수정동이라는 이름 또한 이 원림의 모습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자연계류의 유수를 구조적으로 이용하여 원림공간을 구성한 수정동 원림은 조선시대 중기에 조영된 향리의 별서정원이라는 역사적인 면에서도 가치가 매우 큰 원림유구라 할 수 있다.
       하부의 원림공간은 거대한 암벽아래의 인소정 건물지와 소규모의 계류, 그리고 하지를 중심으로한 계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소정은 암반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주변에 펼쳐진 계류를 조망하기 위한 포인트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곳으로 수정동 원림의 중심적인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정자를 배치하여 높은 시점을 얻음으로서 전면에 펼쳐진 암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약동적인 폭포수를 조망하며 여유로운 풍류를 즐기는 원유공간이다, 인소정 아래의 계류는 보를 막아 형성된 소규모의 수경으로 계곡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동선을 유도하여 근경으로서의 수경을 바라보는 적극적인 수경수법을 도입한 공간이다. 하지는 계곡을 막아 큰 규모의 보를 축조하여 계류를 담아 넓은 수면을 확보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인소정(人笑亭)터
       수정동 계곡에서 산자락이 꺽이는 부분의 끝에 위치하며, 수평거리는 폭포까지는 약 2,793cm, 하연지까지는 약2,237cm로서 평면적인 거리와 높이를 염두에 두고 산세에 맞게 그 위치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전면 1칸, 측면1칸의 정자로 추정.

    상연지

    하연지

    수정암

    요석암
                                                                                                                                    


    문소동원림(聞簫洞苑林) 

    지금까지 문소동은 목신마을에서 무심재를 넘어오는 문소천과 만나는 부분인 고산선생의 제각(추원각)과 산소 근처로 추정하고 있을뿐 정확한 위치를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나, 이곳까지 밝혀지면 고산선생이 해남 현산에서 경영했던 원림의 특징과 함께 이곳에 지은 작품의 특징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산선생이 53세때 당을 짓고 약 1년동안 거쳐했던 곳으로 나중에 그 터에 제각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 윤선도선생의 묘 


       현종 12년(1671) 6월 11일, 고산 선생은 85세의 나이를 일기로 보길도 낙서제(樂書齊)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시신을 운구하여 9월 22일, 금쇄동 옆 문소동에 장사지냈다.
       금쇄동은 산성과 같이 축조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고 , 산소는 거의 서북향을 향하고, 거의 정상이여서 뒤로 배산이 높지 않다. 산소 좌우로만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이는 가봉(加封)하여 조성되었다. 산소의 앞은 얼마 머지않아 다시 떨어지는데 마치 두 손바닥을 나란히 모으고 그 중앙에 묘를 쓴 듯이 하였는데 묘의 좌향이 형국 전체와 약간 그 축을 달리하고 있다.

    묘 앞에 숙종 1년(1675) 2월에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는 묘표석이 있고 망주석과 석인상(石人像)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신도비 =====>신도비문 자세히보기

       상당히 큰 백일홍 나무가 있는 쪽(좌측)으로 약 50m쯤 가면 신도비(碑)가 서있다
    대를 모으고 비석을 세웠는데 지붕돌 가첨석(加첨石)에는 드물게도 기왓골과 서까래 부연을 갖춘 겹처마의 표현이 완연하다. 비문의 전서를 미수(眉수)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이 썼다고 한다.  이조판서에 추증된 일과 영조 3년(1727)에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훈이 있어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하도록 하명된 사적 등이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영모당


       골짜기 산기슭에 동향하고 터를 잡은 대지에 건물이 한채가 있다 생전에 고산 선조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후인들이 고쳐 영모당(永慕堂)을 만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기거하였던 집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뒷간이 오솔길 옆에 있다. 조금 비껴 오르면 기슭의 옹색한 지대를 통과하게 하려 산석(山石)을 큼직하게 떠다가 길을 만들엇다. 그 길이 작은 사주문(四柱門)에 이른다.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토담과 계곡 편으로 쌓은 담장이 문 좌우로 이어지고있는데 매우 고졸하다. 집은 후인들이 다시 지었는지 몰라도 이담장의 일부는 고산 시대의 유물인지 모르겠다.

    안채는 정면 5칸에 측면이 2칸인 규모이며 -자형이다. 그 2칸을 칸반의 방에 반칸의 앞퇴를 두는 분할법을 써서 독특한 성정을 보였다. 집은 가운데로 대청이 있고 좌우로 방이 있는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집은 빈 집이어서 그런지 도비는 다 찢어졌고 방 천장의 반자틀은 뼈대를 드러낸 채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다. 건물 앞에 예의 사랑(斜廊), 퇴가 부설되어 있다. 석탑의 개석 하나가 주춧돌로 이용되어 있다. 녹우당에서나 어초은공의 제실에서, 어쩌면 보길도 건물들에서도 볼 수 있었을 그런 퇴, 사랑의 구조물이 여기에도 있다는 점이 놀랍다.  일종의 일관성인데 좀처럼 관철되기 어려운 의도가 존중되어 있다.  이 점이 일관되고 있는 고산 선생 유적의 정신인지도 모른다. 안채 앞으로 감싸듯이 ┌자형의 부속건물이 한채 더 있다. 그 건물에도 편문이 있어서 뒤로 드나들기 편리하게 하였다. 건물의 상태가 좋지 않다. (목수 신영훈:木壽 申榮勳)
     


    현산고성

       현산고성은 총 길이 1,472m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서 고려 때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조성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동문·서문·북문 등 3곳의 성문터와 수구(水口)·망루지·건물지·제방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관련사이트
    해남군청
    해남문화원

           

     



    XE Login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