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윤선도 기타유적지

 

 


기타 유적지 및 유배지에 대한 자료 모음
  
   
고산 윤선도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유배지 및 은둔지는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퍼져있다.
   사적지로 지정된 해남 녹우당, 보길도, 금쇄동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이 고산촌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부산 기장 황학대일대에 유적지 조성 노력들이 진행중이다.


 

 

부산 기장   ======>자세히보기

   선생은 32세 (1618, 광해10, 戊午) 겨울에 함경도 경원에서 경상도(慶尙道) 기장(機張)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에서 유배생활에 들어간 고산선생은 백사장 건너에 있는 송도를 '황학대'라 이름짓고서 이곳을 매일 찾았다. 육지와 이어져 있고 황색의 바위가 길게 한덩어리가 되어 바다에 돌출되어 있는데 꼭 황학이 나래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황학대라 하였다고 한다. 수십그루의 노송에 쌓여 있는 황학대는 옛날 신선이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중국 양자강하류에 있으면서 이태백, 도연명 등 많은 시객들이 찾아 놀던 황학루에 비교했었다. 이곳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 주옥같은 시 여섯수를 남긴 것 역시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동생 선양과 이별을 나누던 삼성대도 있다. 

*. 황학대 표지판
   "조선조 삼대가인으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가 이곳 죽성에서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선조 20년(1587) 해남윤씨 유심의 차남으로 태어난 고산은 광해군 4년 진사에 급제하고 이어 별시에 장원급제 했다. 그러나 당시 국사를 전횡하던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1년 뒤인 1618년 고산은 죽성으로 다시 이배되어 이곳에서 7년간이나 쓰라린 생활을 하다 해남으로 떠났다. 고산은 이곳에서 상투적인 한자말을 떨어 버리고 순수 우리말을 되살린 충효에 관한 시를 비롯 6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황학대>출처:기장군


양주 고산   =====>자세히보기

   효종은 66세(1652, 효종3, 壬辰) 1월에 선생에게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除授)하여 불렀으며, 3월 27일에는 특명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다. 선생은 여러 번 소(疏)를 올려 사퇴하였으나 효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다가 정언(正言) 이만웅(李萬雄), 집의(執義) 권우(權 ) 등의 반대와 정원(政院)의 쟁론에 부딪치고 선생이 다시 소(疏)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자 효종은 부득이 허락하였다. 선생은 바로 해남으로 내려가고자 했으나 효종의 만류를 생각하여 고산(孤山)의 촌사(村舍)에 머물렀다. 고산(孤山)에 머물러 있던 5월 10일, 선생은 시조 <몽천요삼장(夢天謠三章)>을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경기도 양주군에 있는 거칠뫼마을과 별서터(경기도 남양주군 수석동 323번지 일대). 고산(孤山)이라는 호를 짓게된 배경이 되는 곳이다. 거칠뫼연못 등이 남아있었으나, 부근 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일부 메워졌다. 또다른 유적지로 강언덕에
해민료(解悶療)가 있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거칠뫼와 별서터>

 
<거칠뫼연못>                      


                   <명월정과 해민료터>

고산선생이 72세때인 5월에 손수 작은 초사(草舍)인 해민료(解悶療)를 명월정 서쪽에 지으시고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셨다.
명월정(明月亭)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500여년된 은행나무 한그루(사진 중앙 숲이 우거진 부분)가 그 세월을 간직하고 있다.
위치 : 남양주시 수석동 한강시민체육공원 옆



 


진도 굴포리

   
진도 임회면 굴포리 간척지는 400여년전 고산선생이 간척지를 만들어서 주민들의 생계를 해결해주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주민들이 고산선생의 은혜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굴포신당유적비, 윤고산사적비), 윤고산기념식수인 고송(2주) 등이 있다. 또한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몽리부락(굴포,남선,백동,신동) 주민들이 고산선생을 신위로 한 동제를 모셨왔다. 고산선생이 주민들과 함께 축조한 간척지는 지금 신동과 연동앞의 평야(약 100~200정보)를 말하며 그 당시 축조되었다는 방조제(윤고산둑 : 380m)은 지금 도로로 사용되는 배장군사당 뒤를 통과하는 도로를 포함한 신동과 굴포강의 도로를 말한다. 고산선생이 일시 거주한 거주지는 굴포리 571번지이다.
 


                     <고산 사당>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와 굴포신당유적비>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
 (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

고산 윤선도 선생은 조선시대 중엽 시조문학의 대가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강직한 선비였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도 남다른 행적을 남기셨다 한다.
선생은 이곳 굴포리에서 백정보 가량의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어 이곳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나라의 힘이 미치기 어려웠을 때 외진 이곳에 이 일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그 땅을 부려 온 것은 길이 전할 만한 일이다. 여기 사람들은 선생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이 바다의 둑이 탈이 없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이면 제전을 올리고 굿을 해왔다. 이 사연을 영원히 남기고자 정성을 모아 여기 비를 세운다.
백계 씀.
서기 1991년 4월 6일 건립
굴포, 신동,남선, 백동 주민 일동
 


굴포신당유적비
 (屈浦神堂遺蹟碑)

<전략>
지금으로부터 350년전 고산 윤선도 선생이 간척사업을 하기 위하여 굴포부락에 임시 주거하면서 원뚝을 몇 번이나 막았으나 허물어지므로 당(堂)에 크게 공을 드리던 뒷날 지금의 원뚝터전에 하얀 안개가 끼어있어 이 곳을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안전하게 이르고 있다.
<하략>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우다.






 


함경도 경원

   선생은 30세(1616, 광해8, 丙辰)때 올린 <병진소(丙辰疏)>로 인하여 12월 23일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고, 이듬해 31세(1617, 광해9, 丁巳)1월9일 함경도(咸鏡道) 경원(慶源)으로 압송된다. 시루봉이라는 증산동 아래에 있는 임성동(임城洞)에 거소가 정해졌다. 이곳에서 43수의 한시를 남겼는데, 대체로 나라를 걱정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들이었다. 이듬해(32세, 1618, 광해10, 戊午)에는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雨後謠)> 등의 시조를 지어 한시로 미처 나타내지 못한 감회를 노래하였다.  

 

 


함경도 삼수

   선생은 74세(1660, 현종1, 庚子)때 산릉문제에 이어 다시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선생은 4월 18일, 송시열의 기년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허목의 삼년설을 지지하는 장문의 소(疏)를 올림으로써 조야를 들끓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은 함경도 삼수군(三水郡) 읍내에 안치(安置)되는 조치를 받았다. 또한 선생은 자신이 삼수에서 지은 <예설(禮說)>이 문제가 되어 북청 이배의 명도 취소되고 오히려 위리안치(圍籬安置)의 명이 더해졌다. 76세 되던 해(1662, 현종3, 壬寅) 3월 28일, 위리(圍籬)한 것을 철거하라는 조치가 내려져 읍내에서 관문 밖 선화원으로 옮겼다. 고산선생 관련 유적지로는
자득와(自得窩)와 독경재(篤敬齋)가 있습니다.

 

 


경상도 영덕

  선생은 52세(1638, 인조16, 戊寅) 봄에는 대동찰방(大同察訪)을 제수(除授)받았으나 병을 일컬어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이 대동찰방에 부임하지 않은 일을 기화로 그를 몹시 미워하는 이들은 온갖 이야기를 주워 모아 끊임없이 모함하였다. 병란 때에 해로를 따라 강화도 근처까지 이르렀는데, 서울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달려와 임금께 문안하지 않고 섬(보길도)에 깊이 들어가 종적을 감췄다는 탄핵을 올렸으나 모두 사실 무근임이 드러났다. 다만 달려와 문안하지 않은 것만을 문제삼아 경상도(慶尙道) 영덕현(盈德縣)으로 유배하였다가 이듬해(53세, 1639, 인조17, 己卯) 2월에 석방하였다.
영덕읍 고불봉 아래 있는 우곡리에 배소가 정해졌다. 고불봉, 우곡리, 임경대, 적벽 등의 고산선생 관련 유적지가 있다.

 

 


전남 광양

  선생은 79세(1665, 현종6, 乙巳)되던 2월 27일 삼수(三水)로부터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된다.
4월에 삼수를 출발, 6월에 도착 백운산 아래 옥룡동에 거쳐를 정하였다. 81세 되던 해(1667, 현종8, 丁未) 7월 21일, 현종은 드디어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광양에는 고산선생의 적소로 표시된 '유허지'가 없다. 다만 인근 주민들에게서 전해져오는 이야기와 해남 윤씨 종가의 주장에 따르면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추동마을'이 적소였다고 전해지고 있는 바, 이는 추동마을에 있던 고산선생의 따님 무덤을 종가에서 해남으로 옮긴 사실에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또 옛날 '광양군지'에는 고산선생이 이곳에 유배되었을 때 재정이 어려운 광양향교의 운영을 위해 자기 재산의 일부를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추동마을>사진-여울 제공


<광양향교>사진-여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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